산문방/나누고 싶은 소식들

안동역 앞에서

지도에도 없는 길 2020. 12. 23. 09:23

기존 안동역이 사라지고 새 안동역이 생겼다.

서울 청량리로 향하던 열차의 기적소리를 이제 거기선 듣지 못하게 된다. 사관학교에 다닐 때 오후 4시 30분 열차를 타면 밤 10시경에 안동역에 도착했다. 그리고 낙동강 둑을 따라 밤길을 걸어 집으로 갔다. 인도교를 지나고 영호루를 바라보면서 다리를 건너가다보면 중뜰에 불빛이 간혹 보였다. 은모래가 지천인 강가에 미루나무들이 검은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6.25 전쟁 때는 강을 중심으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고 한다.

어린 날 철교 아래 부서진 탱크가 있었다고 한다. 하기야 집 뒤에서 방망이 수류탄 몇 개를 주워 마당 구석에 진열해 두기도 했다.

안동역을 출발하여 부산으로 가는 열차는 집 앞으로 지나갔다. 어린 날 시골 집으로 가는 길은 철길을 건너야 했다. 철뚝안 동네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철길을 따라 수도 없이 걸었다. 학교에 갈 때도 그 철길을 따라 걷고. 올 떄도 그 길을 자주 걸었다. 철길은 지름길이고 먼지도 나지 않아 쾌적한 길이었다. 철길 옆으로 가다가 멀리서 기차가 오면 철길 아래로 피하거나 철길 옆에 엎드려 있었다.

그 철길, 추억의 철길. 안동역에서 남쪽 무릉역으로는 간혹 화물열차가 다닐 것이라 했다. 그것도 당분간일 지 모른다. 터널을 통과하여 학교에 다닐 때, 그 무시무시한 어둠이 다시 생각난다. 무조건 뛰었다. 기차가 지나가자 말자 터널을 들어갔다. 다음 기차가 오기 전에 지나가려고......

이제 그 기차들도 천천히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사라진 길을 추억하며 어디서 쉬고 있겠지.

 

 

주간경향]
“바람에 날려버린 허무한 맹세였나/

첫눈이 내리는 날 안동역 앞에서….”

2008년 가수 진성이 부른 ‘안동역에서’라는 노래가 행하면서 안동역이 전국에 널리 알려졌다.

지난 12월 13일 안동역에 올해의 첫눈이 왔다. 안동역이 맞는 마지막 눈이기도 했다./서명수 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노래의 무대였던 안동역이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중앙선 철도 복선화에 따른 철로 이설로 지난 12월 17일, 안동역이 안동시 운흥동에서 버스터미널 근처인 송현동으로 이전했다.

숱한 애환이 서려 있는 안동역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에 준공했고, 1931년부터 업무를 시작했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 때 폐허가 되기도 했지만 90년이라는 기간 동안 수많은 승객과 화물을 실어 나르던 안동과 경북 북부지역 주민들의 중요한 교통 관문이었다. 모든 것이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 철도도 예외가 아니어서 좀 더 편리하고 신속한 교통을 위해 다른 곳으로 이전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마지막 열차를 떠나보내고, 문을 걸어 잠그는 안동역을 보면서 만감이 교차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근현대의 관문이자 중심

일제강점기 때 처음 개설한 우리나라의 철도는 국내 각 지역 사람과 물자 유통보다는 일본과 한국, 만주 사이의 병참 및 상품 수송을 위해서였지만 우리 백성들도 그 철도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일제에 의해 철도 건설에 동원되었던 많은 사람이 아이러니하게도 그 열차를 타고 압제를 피해 만주로 떠나기도 했고, 수많은 독립운동가도 경성이나 만주로 가기 위해 안동역을 이용했다. 일본 헌병대의 검문을 당하며 식민지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느꼈을 것이다.

안동역 대합실 전경 / 안동시청



안동역은 중앙선이 지나는 곳이다. 위로는 서울 청량리, 그리고 아래로는 부산으로 가는 길목 역할을 했다. 처음 철도를 개설할 때부터 안동을 비롯한 경북 북부지역의 수많은 젊은이가 청운의 꿈을 안고 부푼 마음으로 안동역을 출발해서 서울로 향했다.

안동역은 수송만 담당했던 것이 아니다. 편리한 교통의 중심지가 되어 이곳을 거점으로 안동의 행정, 금융, 상업, 교육 등 근현대의 원도심을 형성하는 동력이 되기도 했다.

올해 첫눈이 온날 안동역에는 역사 이전을 알리는 현수막이 붙어 있다. / 서명수 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역 광장은 시대를 상징하는 각종 집회도 많이 열렸다. 대통령선거 때가 되면 어김없이 대규모 유세가 열렸고, 도청 이전 촉구 궐기대회 등 집회에 수만명의 시민이 운집했다. 역은 언제나 사람들이 들끓었다. 그래서 역전에는 ‘역마차’나 ‘역전’ 같은 이름을 가진 다방이 많았다. 그곳에서 젊은 남녀들이 맞선을 보고, 열차로 상대방을 보내고 다음을 약속하기도 했다.

하염없이 열차시간을 기다리는 일은 힘들었다. 아주 오래전에 사라졌지만, 역에서 200m 거리에 ‘문화극장’이 있었다. 남는 열차시간에 영화를 보며 달래기도 했다. 많은 사람이 모이다 보니 음식점도 성황이었다. 특히 역 앞에는 갈비 골목이 있어서 지금도 번창하고 있다. 그러나 역이 이전하고 나면 예전 같지 않을 것 같아 상인들의 걱정이 많다.

안동역 신축공사 기공식 모습/경북기록문화연구원



안동역은 이별의 장소이기도 했다. 가족을 두고 부득이 객지로 떠나야 하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작별했다. 개찰구를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때로는 플랫폼까지 가서 이별의 짠한 아픔을 나누었다. 명절쯤에 객지에 나간 자녀나 가족이 도착하는 날이면 출구 앞에서 더디 가는 시간을 자꾸만 보며 그리운 사람들을 기다렸다. 기다림 끝에 만나면 서로 얼싸안고 반가움을 나누었다.

가장 눈물 나는 이별의 순간은 입영열차였다. 군 입대를 하는 장정들은 인근에 있는 안동초등학교(당시 중앙국민학교)에 집결해 약 500m 거리의 안동역까지 함께 행진해 걸어갔다. 전송하러온 가족들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행렬을 따라 함께 걸었다. 가족들은 플랫폼까지 따라와서 오랫동안 보지 못할 모습이 안타까워 얼싸안기도 했다. 특히 애인을 떠나보내는 여성들은 더 애틋했다. 떠나는 열차 창밖으로 내미는 애인의 손을 붙들고 한없이 울곤 했다. 그러나 이별의 시간은 어김없이 다가왔고 기적을 울리며 길게 꼬리를 끌며 지나가는 열차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며 작별을 아쉬워했다. 역은 그런 이별의 순간을 모두 지켜보았을 것이다.

새 역사로 이전, 그러나 아쉬움

숱한 애환을 간직한 안동역은 운흥동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 안동시 송현동 버스터미널 옆에 문을 열었다. 고속철도를 위해서 옹천-광평-신안동역을 잇는 새로운 철로를 건설해 기존 안동에서 청량리까지 3시간 걸리던 시간이 2시간으로 단축된다. 내년 10월쯤 예상되는 완전한 복선 개통 이후는 1시간 20분대로 줄어든다.

물리적 거리는 멀지만 고속철도 덕분에 시간적 거리는 경천동지할 정도로 가까워진다. 게다가 2016년도에 안동으로 이전한 경북도청과 새 안동역은 불과 17㎞, 차로 15분 거리에 있어 앞으로 기존 도심과 도청 신도시가 새 안동역과 연계해 발전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됐다. 안동역 이전으로 종전 안동댐 인근을 지나던 철로는 철거될 예정이다. 일제가 민족정기 말살을 위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선생의 임청각 앞으로 철로를 개설해 3분의 1가량 소실된 건물도 복원할 것이라 한다.

그렇지만 숱한 아픔과 애환을 간직한 90년 역사의 안동역이 이제 영원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 것은 가슴 짠하게 아쉽고 그리운 일이다. 앞으로 어떻게 개발될지는 알 수 없지만 역사 건물도 머지않아 철거될지도 모른다.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안동역, 다시 돌아오지 않을 마지막 열차가 떠나고 이제 더 이상 기적 소리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머지않아 굳게 잠긴 역사 위로 ‘안동역에서’ 노래 가사처럼 눈이 하염없이 내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눈이 녹는 것처럼 안동역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도 점차 희미하게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이제는 사람도 열차도 더 이상 다니지 않는 안동역, 무거운 침묵만이 빈 광장을 가득 채우고 있다.

김윤한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