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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일손지묘

지도에도 없는 길 2018. 10. 18. 16:30

서정문의 역사칼럼

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墓)

칼럼 ㅣ 서정문 칼럼니스트 ㅣ 2018년 05월 28일 (월) 13시 24분 19초
 



머리가 허연 팔순의 4.3 문화해설사는 눈발이 날리는 쌀쌀한 날씨에도 끝없이 말을 이어갔다. 4월에 눈이라니. 4.3 유적지를 탐방하기에는 적당한 날씨. 날씨라도 스산하고 비바람이 불어야 마음이 덜 불편할 것 같은 날이다. 산방산이 보이는 너른 벌판에 아기 무덤처럼 묻힌 百祖一孫之墓앞에서 잠시 고개를 숙이자 노란 유채꽃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태극기는 조기로 매달려 세찬 바람에 흔들리고. 섯알오름 아래 알뜨르비행장 탄약고 자리에서 한날한시에 처형된 사람들. 누구의 시신인지 알 수가 없어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 한다.

 

제주 4.3으로 인해 감옥으로 간 사람은 부지기수였다. 형량의 경중에 따라 멀리 서울의 교도소로부터 전국의 교도소에 수용이 되었다. 제주도의 교도소에도 다수의 사람이 투옥되었다. 그러다가 6.25가 발발하자 전세는 불리하게 전개되어 포항까지 밀리게 되었다. 다급한 정부는 몇 차례에 걸쳐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선별하여 처형하였다.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밀려 내려옴에 따라 그들에게 협조할 것을 두려워하여 처형한 것이다.

 

제주 감옥에서 끌려 나온 이들은 더러는 바다에 수장되기도 하였으며, 어디론가 가서 몰래 처형이 되었다. 그 마지막 처형의 대상이 된 사람들이 밤중에 끌려간 곳이 바로 일본군이 만든 탄약고 자리였다. 일본이 패망하고 미군이 이를 접수하면서 다량의 탄약을 처리하기 위해 폭파한 자리가 우묵하게 패여 있었다. 그곳에는 두 개의 큰 구덩이가 있는데 오른편 구덩이는 한림 사람들. 왼편은 대정 사람들이 처형된 자리였단다. 나중에 시신을 처리하기 위해 확인하여 보니 오른편은 대부분 시신 확인이 되었는데, 왼편 구덩이의 시신들은 많이 훼손되어 확인이 어려웠다.

 

오른편 한림지역 사람들은 확인된 두개골에 팔과 다리 등의 유골을 수습하였으며, 왼편 대정지역 사람들이 처형된 곳에서는 도저히 확인되지 않아 뼈들을 대략 수습하여 한 곳에 무덤을 만들었다. 해설사의 말에 의하면, 90이 된 한림의 어느 희생자 부인이 이담에 돌아가면 남편의 무덤 곁에 묻히겠네요했더니, 그 할머니는 손을 절레절레 흔들며 그 영감 묘 옆에 묻히기 싫다고 했단다. 이유는 두개골만 남편이 확실하지 다리와 팔 등은 다른 남자의 뼈인지 알 수가 없는데 어찌 외간 남자의 옆에 같이 눕겠는가라 했단다.

전쟁의 와중에 재판 없이 처형된 많은 사람. 그들의 후손과 친척들은 이제까지 소리 없이 살아왔다. 올해는 4.3 발생 70주년. 전국적으로 그 의미와 역사를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데올로기로 인해 죽었거나, 무고하게 희생되었거나 이 4월은 너무 잔인하다. 무고하게 죽은 사람들의 피맺힌 한은 회복되어야 할 것이며, 이념으로 인해 죽은 사람들 또한 한 사람, 인간으로서 그 죽음은 안타까운 것이리라.




서정문 칼럼니스트 ㅣ 시인, 수필가 / 정치학 박사
연성대 겸임교수, 전 성결대 외래강사
육군 대령 전역, 한미연합사, 국방부, 주 자유중국(대만) 대사관 연락관 근무, 연대장
시인, 수필가, <우리문학> 및 <한국수필> 등단
국제펜클럽 이사, 한국문인협회, 현대시인협회 회원
전쟁문학상, 화랑문화상, 국방부 주관 호국문예 시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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