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지, 신문, 동인지 등 발표된 작품들

정유재란, 그 아픔의 전쟁 2

지도에도 없는 길 2018. 2. 5. 15:12

년간의 임진왜란 이후 일본은 부산에서 물러가지 않고 3년을 더 버티었다. 그러다가 다시 전쟁을 일으켰다. 이른바 정유재란이다.

  

영화 명량에 의하면, 이순신 장군의 수군은 13척의 배를 가지고 일본군과 싸운다. 명장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육지에서 패배가 이어졌다면, 바다에서는 연전연승이었다. 백의종군 이후 다시 기용된 이순신 장군에게 남은 배는 겨우 12. 그는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병선이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부하들을 독려하여 승리를 거둔다.

 

임진왜란을 통해 가장 주목받은 인물은 이순신 장군이었다. 그는 당시 삼도수군통제사였다.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수군을 총지휘하는 대장이다. 강직하고 원칙주의자였다. 이순신에 이어 수군을 맡은 원균은 부산 앞바다로 출정하였으나 많은 배를 잃고 패전하고 말았다.

 

연전연패에 당황한 조정과 선조는 다시 이순신을 불러 수군을 맡겼다. 이순신에게 남은 배는 12, 추가로 배 한 척을 합하여 총 13척이었다. 13척으로 130여 척의 일본군을 방어하였다. 당시 백성들도 이순신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민과 군이 함께 힘을 합해 어려움을 극복한 것이다. 이순신은 군함 뒤에 수백 척의 민간 어선을 세워 위장전술을 펼쳤다. 적보다 절대적으로 부족한 함선이었지만, 함선의 숫자를 많이 보이게 하여 적이 쉽게 공격하지 못하게 하였다.

 

연전연승하였던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쉽게 하지 못한 일본군이었다. 이순신은 미리 알고 있던 지형과 기상을 적절하게 이용하여 승리를 끌어낼 수 있었다.

 

이후,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유언을 남겼는데 전쟁을 중지하라는 것이었다. 퇴각하는 일본 수군을 향해 추격전을 벌였고, 이순신은 결국 노량전투에서 적의 총탄을 맞아 전사하고 말았다. 전쟁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그는 홀연히 전장에서 최후를 맞이하였다.

 

이순신은 원칙을 고수하면서 철저하게 준비하고 연구하는 가운데 지형과 기상, 그리고 적에 대한 정보를 끊임없이 수집하였다. 그렇게 하여 연전연승을 거둘 수 있었다. 현장 지휘관이 가장 정확하게 전장을 안다는 신조를 굽히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철저하게 준비하는 지휘관이었다. 적을 알고, 나를 돌아보며 공부하고 준비하는 자세야말로 바로 전쟁에서 승리를 얻는 가장 중요한 핵심이 아니겠는가.




서정문 칼럼니스트 ㅣ 시인, 수필가 / 정치학 박사
연성대 겸임교수, 전 성결대 외래강사
육군 대령 전역, 한미연합사, 국방부, 주 자유중국(대만) 대사관 연락관 근무, 연대장
시인, 수필가, <우리문학> 및 <한국수필> 등단
국제펜클럽 이사, 한국문인협회, 현대시인협회 회원
전쟁문학상, 화랑문화상, 국방부 주관 호국문예 시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