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성!
성이 있다는 이야기인가? 성을 쌓았다는 말인가? 단양휴게소를 알리는 네비게이션 소리에 차량의 속도를 늦추었다.
단양휴게소는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잠시 들러 볼 수 있는 휴게소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다. 안동에서 출발하여 한 시간이 되지 않는 휴게소이지만, 다른 곳과는 다른 것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적성산성이 있기 때문이다. 적성.
적성에는 말 그대로 성이 남아있다. 단양휴게소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고개를 들어 휴게소 뒷산을 바라보면
거기 산 중턱을 가로 질러 성곽이 보인다. 그 성곽이 바로 적성산성이다.
휴게소에서 한 시간정도 시간을 허락한다면, 산 중턱에 둘러 쌓여 있는 성곽을 보면서 오랜 역사가운데 삼국이 치열하게 다툼을했던 그 자리. 신라가 여기까지 와서 이곳을 차지하고, 그 흔적을 남긴 자리가 바로 이 산성이다. 성 아래로 굽어보이는 강은 바로 천연의 요새가 아닐 수 없다. 성곽을 따라 걸어가다보면 아직도 와편들이 그 오솔길에 널려 있다. 성곽을 오르다보면 반드시 지나게되는 키가 큰 느티나무. 거기는 저 아래 강에서 옮겨 왔을 큰 호박돌들이 지천으로 가지런하게 쌓여 성벽을 만들고 있다. 어떻게 이런 많은 돌 들을 옮겨왔을까. 그 당시 성을 축조하는 공사에 동원 되었을 백성들의 지난한 노고와 아픔이 가슴으로 전해온다.
오늘은 더 여기를 오고 싶었다. 휴게소를 알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데, 바로 저 앞 강 위에 낮은 안개, 아니 구름이 산 중턱을 감싸고 있는 것이다. 핸들을 돌려 휴게소에 차량을 세우고 바로 성곽으로 향했다. 얼마를 올라가지 않아 강 쪽을 보니 산 허리를 가로질러 아침 안개인지 구름같은 것이 띠처럼 둘러져 있다. 사진 몇 장을 찍었다. 그리고는 청명하게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성곽 초입의 느티나무를 찍어보았다
가을 단풍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 더욱 붉게 변한다. 가을은 성큼 휴게소 뒷편 공원으로 스며들고, 희고 보라빛 가을 꽃들이 아침 이슬을 머금고 섰다.
적성산성의 축성 연대는 신라진흥왕 때인 545∼551년경으로 알려지고 있다. 동쪽으로는 험준한 죽령고개와 1314m의 두솔봉과 723m의 두악산이 적성산성과 연계되여 있다. 신라와는 가장 가까운 죽령을 끼고 죽령산성에서 흘러 내린물이 죽령천을 이루어 적성산성을 안고 돌아 남한강에 흘러 들어가고있다.
서쪽은 1015m의 금수산과 가은암성이 우뚝 솟아있어 남한강을 경계로 상 , 중, 하선암의 맑은 물이 단양천을 이루어 또 다시 남한강으로 흘러 들어 간다.
남쪽은 소이산 봉수대를 남한강이 안고 돌아 삼국시대때 한강수로 장악을 위하여 사력을 다하던 때라 단양천 죽령 남한강 적성산성을 중심으로 감싸고, 합류되는 곳이라 지형적으로 요충지임을 입증해주고 있다.
북쪽은 오대산에서 발원한 동강과 서강물이 정선 평창 주천 임계에서 부터 흘러 영월에서 합류하여 단종의 애닳은 사연을 남한강물에 실고서 고구려의 전초기지였던 영춘 온달 산성을 휘돌아 도담삼봉, 신단양 시가지를 지나서 적성산성 아래로 흘러오므로서 명산대천의 맑은물이 적성산성에서 모두가 합류된다.
또한 물뿐이 아니고 적성산성을 중심으로 온달산성, 가은암성, 독낙산성, 죽령산성, 공문성 등 많은 산성이 있음으로 보아 물, 산 성의 총집합지역으로서 이곳은 신라가 고구려를 공략한후 신라의 전초기지로 사용했음을 지형지세로 보아 알 수 있다.
해발 323m밖에 되지 않지만 적성산성은 신라의 영인 영주쪽에서 오자면 죽령을 넘어 한강을 도하하기 바로직전 첫번째 강 언덕이며 성재산 정상부분에 축성함은 지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지리적으로 천험하고 전략적으로 높지 않지만 현과 가깝고 오른쪽은 단양천 왼쪽은 죽령천 전면은 한강물 후면은 두악산 두솔봉이 있어 사방을 골고루 정찰할 수 있는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신라가 서기 158년 3월 죽령길을 개척하고 북방경로을 개척하여 고구려를 공략하고자 본격적인 고구려 공략을 위한 전초기지를 여기에다 구축했다.
구전에 의하면 적성산성을 중심으로 북쪽은 고구려가 진을 치고 남쪽으로는 신라에서 수자리를 살았다고 합니다. 성문이 북쪽에는 없고 남쪽에만 있음으로 보아 이 산성은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고구려의 침입을 막기 위한 신라의 석성이다.
성의 기초는 별로 인공을 가하지 않고 토석으로 다지고 외벽을 할석 및 자연석으로 축조했고 성벽 외면은 높지 않고 인마가 상부로 다닐 수 있는 평평한 방식은 삼국중 신라와 백제가 흔히 사용했던 축성 방법이다.
성내의 출토 유물은 삼국시대의 토기조각과 기와조각이 발견되며 고려시대의 토기 청자편 기와 조각이 출토되기도 한다. 단양은 소백산맥의 북쪽에 있어 산맥에 의하여 경상문화권 또는 신라문화권과도 격리 되였기 때문에 신라 쪽에 기울고 있지만 파편중에는 타봉 의사 무문이나 격자문이 시문된 곳이 있어 백제토기와 일맥 상통하는 면이 있다고 한다.
이것은 단양을 통하여 신라경상문화보다는 충주를 통한 서해안으로 백제지방과 지리적으로 통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출토된 회색 경질토기편이 그 근거라고 하며 이와 같은 파편이 부여 지방 백제문화권에 출토된 것과 같다는 것으로 볼 때 삼국의 문화가 두루 단양지방에 정착 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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