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TV에서 보면 '계백'이란 프로를 방영하고 있다.
백제의 무왕시절이 배경이다
무왕의 아들 의자왕과 사택왕후를 등장시켜 극을 전개하고 있다
역사적인 사실에 기초는 하고 있지만
흥미를 위하여 일부 각색을 하였다고 보여진다
드라마에서 사람과 사람사이의 애정과
애증과 정은 어느 시대나 없다면 드라마의 재미가 없을 것이다
선화공주가 스스로 자결을 하고
그 아들 의자는 살아남기 위하여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고 있다
역사에도 사택왕후는 의자를 아껴
왕위에 오르는데 도움을 준다고 했던가
백제가 마지막으로 가는 길목에 선 당시
의자왕과 계백의 만남
그리고 오연수가 분한 사택왕후의 역사기록은
드라마의 재미를 더욱 더하여 준다
그러고보니 생각나는 것 하나
'제망매가'에 의하면 일찍 죽은 누이를 위해
종이돈(지전)을 뿌리며 저승가는 길의 노잣돈으로 사용했다
지금 우리에게는 사라지고 없지만
지금도 중국(대만)에는 사람이 죽으면
많은 지전을 준비하여 저승가는 죽은이의
노잣돈으로 사용하라고 장례길에 뿌리고 있었다
오랜 시절의 삼국시대 문화가 중국에서 전래되었는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이미 없어지고
중국에는 아직 남아 있는 풍습이었다
왕궁리 5층석탑과 미륵사지의 선화공주
전북 익산시 금마면에 있는 왕궁리 유적지.
마침 익산에 갈 기회가 생겨 우선 지도를 보 면서 익산에 대해 지명부터 살폈다. 그래서 찾은 지명이 바로 왕궁리였다. 무언가 있을 것같은 지명, 역사적인 무엇이 담겨 있을 것같은 지명이었다. 그렇다. 왕궁리는 국보 289호로 지정된 왕궁리 5층석탑이 있었다. 금마면 동네 식당 아주머니가 일러준 대로 가니 바로 넓은 벌판에서 유적전시관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 5층석탑이 아침 햇살을 받으며 서 있었다. 왕궁리 5층석탑은 백제탑의 양식을 일부 갖춘 통일신라 시대의 탑이다.
왕궁리에서 북으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미륵사지가 있다. 2009냔 1월 14일.익산시에 위치한 자꾸 기울어져가는 미륵사지 서탑 1층을 해체하던 중 사리호, 금제사리봉안기.은제관장식, 사리 등 550여점의 유물이 나왔다. 이 가운데 사리봉안기가 특히 눈길을 끌었는데 거기 새겨진 글 내용이 그것이다.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으로 ...능히 정재를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시고 기해년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 이제까지 백제 무왕의 왕후인 선화공주의 발원으로 미륵사를 지었다는 기존의 믿음을 송두리째 흔드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부여박물관 학예사는 '사택왕후의 존재로 선화공주의 존재가 부정되지는 않는다. 선화공주는 실존인물이다. 선화공주와 사택씨는 모두 무왕의 왕후이다. 미륵사 발굴결과 중원이 서원보다 일찍 조영된 것으로 알려졌고, 선화공주의 발원으로 중원이 설립되고, 사택왕후의 발원으로 서원이 건립되었을 것이다'라고 한다.(동아일보 2011.6.2일자)
다시 왕궁리로 돌아가서,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기울여져 가는 왕궁리 5층석탑을 복원하기 위하여 1965년 해체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때 석탑 기단부에서 세 개의 사리공이 발견되었고, 사리 유물이 출토되었다. 지름 3센티미터의 청동방울과 유리와 옥으로 만든 구슬이 나왔다. 통일신라 시대의 청동여래입상도 사리공에서 나왔다. 그리고 동쪽 사리공과 서쪽 사리공에서 각각 순금사리함과 금동외함이 나왔고 서쪽 사리공에서 나온 금동외함에서는 금제금강경이 나왔다. 불교경전인 금강경을 경판에 새긴 것 이었다.순금으로 만든 경판 유물로는 세계에서 유일하다. 열아홉 장이 순금 경판에 아래 위로 순금 경첩을 달아 한 권으로 연결하고 그것을 다시 두 줄의 금띠로 묶어 만들었다. 이 금제금강경은 중국의 둔황에서 발견된 금강경 사경본과 공통점이 있었는데 이는 금강경 원문의 62자가 누락되어 있었다. 이는 822년 이전에 제작된 중국의 둔황 사경본과 연대를 함께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금제금강경의 제작 연도는 822년 이전으로 추정한다. 원래 왕궁리 5층석탑은 통일신라 시대의 탑이다. 석탑의 기단부에서 나온 금동여래입상은 통일신라의 불상이다. 그리고 지붕돌에서 나온 금제금강경은 백제의 것이다. 따라서 왕궁리 5층석탑이 세워지기전에 백제의 목탑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증명할 것이 발견 되었는데 석탑 해체과정에서 목탑지의 판축층에서 백제 사비 시대의 연꽃무늬 수막새가 출토된 것이다. 목탑이 자리한 곳에 5층석탑이 다시 세워진 것이다.
왕궁리 유적지는 대략 4만여 평에 해당한다. 왕궁은 동서 방향으로 234미터, 남북으로 492미터의 성곽을 가졌다. 직사각형 모양의 고대 왕궁의 구조 그대로 인것이다. 따라서 왕궁은 사비시대 즉 무왕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의 국제상황은 백제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무왕보다 앞선 백제의 성왕은 551 년 신라 진흥왕과 손을 잡고 고구려에 빼았겼던 한강 유역을 되찾았다. 그러나 진흥왕은 2년 뒤 백제를 배신하고 한강 유역을 차지한다. 신라의 배신에 화가난 성왕이 554 년 신라를 공격하다가 전사한다. 신라를 원수로 여겨야할 백제이지만 고구려와 신라 모두를 적으로 삼기에는 힘이 부족했다.
백제 무왕은 당시 백제의 왕위 계승 방식에 의해 혜택을 본 사례로 보여진다. 백제는 왕위 계승은 적장자 뿐아니라 기타 아들들에게도 기회가 주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위덕왕은 아들이 없었고, 따라서 위덕왕의 동생인 부여계가 주목을 받았으나 그는 이미 위덕왕과 비슷한 고령이었다. 그의 아들인 부여선 ---그리고 그 부여선의 자식들 가운데 무왕인 서동이 있었다. 당시 익산지방의 유력한 귀족인 사택집안은 유연한 사고와 베짱을 갖춘 서동을 눈여겨보고,그에게 딸을 보낸다. 무왕은 신라를 열 두차례나 공격했다. 그가 신라 의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이한 것은 사실로 보이나 선화공주가 미륵사지를 짓기를 건의했다는 것은 새로운 해석으로 자리매김 되어야할 것으로 여겨진다. 무왕은 서동으로 신라 곳곳을 다니면서 마를 팔고 신라 물정을 낱낱이 알게 된다. 이는 신라 정벌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당시 신라와의 격전지는 익산 부근 이었으며 따라서 무왕은 백제 중흥을 위해 익산에 왕궁을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무왕의 고향인 익산은 또 다른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무왕은 죽어서 익산에 묻혀 있다. 익산 쌍릉이 바로 무왕의 무덤이라고 추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의하면 무왕은 630년 2월에 사비궁을 수리했다고 하며 "무왕 31년인 630년에 사비성을 고치고 왕이 웅진성으로 옮겼다"라고 하여 다시 사비로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후 익산 왕궁은 파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왕궁리 유적지를 찾은 시간은 아침 이었다. 막 햇살이 솟아오르는 시기, 영화를 누렸던 백제가 다시 익산을 거점으로 중흥하기 위해서도 매일 저 태양을 보며 다짐을 했을 것이다. 그 날의 해는 다시 뜨고 시대는 지나고 사람들은 가고 탑만 남았다. 지난 시절의 사람들은 죽고 그 자리에 흔적만 광활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국내여행 > 여행기--일상을 떠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일도 생가를 가보았네 (0) | 2011.08.20 |
---|---|
울진 성류굴을 가다 (0) | 2011.08.20 |
용문사 사진 몇 장을 추가하다 (0) | 2011.08.04 |
유엔군 화장터 (0) | 2011.07.29 |
여강의 물소리는 신륵사로 모여들고 (0) | 2011.07.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