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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010 년 봄 《시에》신인상 당선작 _ 김기화, 변영희, 김혜경

지도에도 없는 길 2010. 6. 27. 15:24

2010 년 봄 《시에》신인상 당선작 _ 김기화, 변영희, 김혜경

 

 

아메바의 춤 (외 2편)

 

  김기화

 

 

여우의 눈물로 태어난 탓인지 그녀는

줄곧 꼬물거리며 배밀이에 빠져 있다

독하고 치열한 돌기<突起>를 반복하다가

가끔씩 흔적없이 소멸되기도 하지만

육신으로 바닥을 기는 하등의 몸부림이었다

깃털을 세운 파도가 하얗게 와 닿은

뱃고동 기슭엔 바다의 나이가 물금져 있다

바람과 파도가 만난 시간의 갈피에

그녀가 푸르게 갈긴 육필원고가 출렁거렸다

해물해물 그녀만의 섬을 질퍽거리는 오후

횡간으로 누운 수평선이 교미를 시작했다

둥둥 수많은 무생물과 생물의 불시착으로

포구마다 뱃머리마다 산란된 필적

차마 새길 수 없어 해감된 수면의 침묵을 보라

뗏밥처럼 붙어 있는 직립형 아메바들은

거대한 바다의 물길에 하찮은 비린내 풍겼던가

언제든 뒤엎을 수 있는 해면에 입질을 해대는

저공의 갈매기 한 마리가 날개를 헤적인다

밀물과 썰물의 육감적인 생을 사는 그들의 방식

물보라 속을 떠도는 바람의 깃을 세워본다

현미경 속에서 만난 알몸 춤사위는

끝나지 않은 그녀의 출입구였으리라

꾸물렁 여우의 눈을 가진 바다를 다녀왔다

 

 

 

조망권을 드립니다

 

창공을 날던 새 한 마리 조망권을 사려는 듯 기웃거려요 분양 안내판 위에 올라앉아 콕콕 조감도를 찍어요 두리번두리번 뾰족한 부리가 없는 그녀는 조각 된 낯선 그림 앞에서 밋밋한 평면이에요 그 평면을 딛고 수직으로 오른 고층 소용돌이가 프리미엄을 달고 하늘을 날아요 고급 소재로 시공된모델하우스를 둘러보던 그녀는 도시귀족이 되어 계약서를 작성할까요? 꼼꼼 실내 건축가의 화려한 이력이 눈조리개를 펼치네요 최첨단 서랍식 환풍기아래 오글보글 모형찌개가 끓어요 대리석 식탁 위의 열대과일이 탐스러워 아삭아삭 군침을 돋우네요 아트홀 품격으로 인테리어한 가구는 옵션이에요 일조량을 들여와 공간을 연출한 그가 넌출넌출 액자 속을 걸어 나와 말을 트네요 조망조망 하얀 혀를 놀리며 조명 아래서 세련된 디자인을 해요 베란다 확장공사는 시공사의 미끼라나요 점점 몰려든 인파들이 통유리 안에서 조망권을 저울질해요 물지느러미를 달고 전망을 흔드는 밀물과 썰물, 바다의 모양이바뀌고 있는 걸까요? 하늘과 산과 구름과 햇살은 모두 예약된 프리미엄이에요 창창 수평선이 보이는 신도시개발지역, 파도가 하얗게 음소거된해면도 육지를 향해 자맥질 하네요, 꿈틀

 

 

사서함 106호

 

누군가 내 배꼽에 태엽을 감아줘

겨드랑이 가려워도 날개는 돋지 않아

붉은 녹물 흐르는 철문을 열어줘

그저 비상하고 싶을 뿐이야, 나는

저벅저벅 아득한 군화소리 들려오면

내 몸은 온통 직모로 각이 서지

날 차라리 감전시켜 달라고

더듬이를 세워 열쇠 구멍을 문지르지만

누군가 봉해 버린 입은, 사서함 106호

점점 굳어 가는 내 배꼽을 좀 봐

아무리 비벼도 정전기는 일어나지 않고

이미 식어 추운 동절기 같아

아무나 열 수 없는 블랙박스가 내 이름이야

철커덩 위험수위를 벗어나

내 몸의 내장까지 독식하려는

군사서함이라는 함구령에 불침번을 섰어

절벽으로 떠 있는 샛별 앞에서

더듬떠듬 미명의 동공을 꺼냈어

스프링 달린 내 눈은

어둠 속에서 또다른 어둠을 폭식한 채

눈 먼 별과 동침을 했지

축축한 바람이 가라앉는 시간

사서함 106호, 그 건너 편 아파트에서

내 몸에 꼭 맞는 사서함을 짠 듯

직사각형 관 하나가 곤돌라를 타고 내려왔어

 

 

 

 

김기화 : 충북 청원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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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기록 (외 2편)

 

  변영희

 

 

긴 하체가 매달려 있다

발목이 야무지게 물린 두 발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흰 수건과 붉은 수건

곁에서 땀을 닦아주고 있다

대문은 분명 굳게 닫혀 있다

나직한 감장도 완고하게 입 다물고 있다

눈꼬리가 올라간 첼리스트의 연주가 불러들인 바람

살아있는, 혹은 죽어 있는 모든 사물들

춤추게 한다

살갗이 가려운 감나무

바람과 몸을 부비며 얼룩진 각질을 털어낸다

눈이 휘둥그레진 바이올렛

심하게 흔들리지만 목이 부러지진 않을 것이다

낮게 엎드려 눈만 감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테지

참 다행인 것은

그날 어디에도 눈을 홉뜬 얼굴은 매달리지 않았다는 거

수수께끼를 남겨 두고 별의 운행이 시작되었다

조금씩 증발한 물기의 기록

별들의 비탈을 청색으로 물들인다

 

 

 

명명에 대한 때늦은 통찰

 

1.

쥐바위에 올랐다 쥐똥나무가 자라고 있다

쥐똥 같은 열매 너머 검게 여문 바다

배경으로 함께 익어간다

파리한 웃음을 남기고 허공을 타는 거미들

밧줄은 단단했고 또한 말랑했다

 

2.

말똥바위에 올라가 옛사람을 만났지

말똥계곡을 지나 바닷가 절벽 위에 오른 그는 말을 타고 있었어

절벽을 때리는 매운 파도를 말은 견딜 수 없엇을 테지

놈의 내부에 있는 모든 것을 배설하게 했던 것은 공포였을까

말똥을 밟아봐 말똥에 박혀 후들거리는 다리를 당겨 당겨봐

 

3.

말과 쥐가 무리지어 달리는 바다 위

컥컥 토해낸 나의 언어들

자음과 모음으로 나뉘어 떠도는 시푸른 이름

과거와 현재를 달려 이르게 될 미래

덧붙여, 덧붙여 진화하는 장난감로봇

 

 

지겨운 소설

 

 

지하철을 타고 공간 이동하던 어느 날이야

줄줄이 머리를 아래로 꺾고

침 흘리는 표정으로

문자와 사이버의 세계에 걸쳐 있더군

한 사람만이 눈을 깜박이며 허공을 더듬고 있었어

앞에 서 있는 남과 여는 반짝이는 별이었을까

몸을 촘촘히 기대고

맞잡은 손 한없이 꼼지락거리는

처음에는 여자가 너무 몸을 기울이고 있어서

술에 취했나 착각했지 뭐야

말해주고 싶었어

너무 기대지 마

버거워하며 밀어낼 수 있어

뜨거운 발열체가 내장된 사랑이란

고장의 위험도 빠르게 나타나지

흐흐흐

미리 말해줄 필요는 없는 거라고

젊은이는 생의 스펙터클을 만끽해야 한다고

낮은 속삭임이 들려오더군

마주 보고 앉는 지하철에서는

졸리지 않아도 눈을 감아야 해

회색 청년들 밑줄 좍 그어가며 책을 보<읽>더군

그들은 소설같은 생의 모퉁이를 돌고 있었을까

그런데 말이야

지하철 죄석에 앉을 때

다리는 가지런히 붙이고 앉았으면 해

뾰족한 구두코를 날리고 싶은 충동

알아?

 

  

 

 변영희: 전남장성 출생, 동국대학교 영어영문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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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슨 방 (외 2편)

 

  김혜경

 

 

드럼통 속 이글대는 장작불이

오늘도 허탕이란 소리 귓전을 때린다

 

칸칸이 궁핍을 들인 골목길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외쳐보지만

아무리 새벽을 밟아도

좀처럼 나아가지 않는 발걸음이

다시 또 산<山>만한 그림자 이끌고

돌아와 녹슨방에 메아리 되어 눕는다

 

채워지지 않을 공복으로

후미진 골목 휘우듬히 들어서면

관 같은 영점 칠 평, 어둠으로 빼곡하다

나지막한 천장을 타는 거미 한 마리

곰팡이 꽃 만개한 꽃자리에서

생의 그물을 깁고 있다

잠기지 않는 수도꼭지에서 쉴 새없이

똠방 똠방 똠방

지금 누구에게 타전 중이다

 

그 무작정의 기다림 뒤로하고

삶의 덧문을 통과한 소식들만불쑥,

들어설지 모를 죽음과의 거리를

불온하게 좁혀온다

 

 

불통.2

 

 

이곳에건 단숨에 숨통을

끊을 듯 끊어놓지 않는 게 법칙이라네

횟집 수족관의 뜰채가 무시로 들락거릴 때마다

똥구멍까지 치받는 죽음을

근사하게 유예시켜

혼신의 힘으로 진저리치도록

 

그 환한 형장을 빠져나오며

두눈 부릅뜬 채 듣는

심해의 느린 뒤척임 소리

마비된 통점을 후벼파네

혼미해지는 의식

추슬러 헤엄쳐 나간들

닿을 수 없는 열망의 거처여

 

이따금

삼척 정라항 짙푸른 물결에

느긋한 시선을 푹 담그었다 꺼내며,

흐뭇한 임종을 포식하네

 

밤상머리에 둘러앉은 귀머거리들

 

 

오후 두 시

 

 

정류장에 닿은 버스가 황급히 옆구리를 벌려

아이와 아낙을 꺼내놓고는

허리춤 추켜올릴 새도 없이 자리를 뜬다

아이는 세상의 근심 다 쓸어 담아 울상이고

아낙은 그 근심 죄다 쓸어내 주려는 듯

서둘러 아이를 들쳐 안고 길섶의

산수유 노란 꽃그늘 속으로 든다

한켠에 팽개쳐진 짐 가방이 뿌루퉁하다

아이의 부끄러움 감추기 위해

뒤돌아 앉은 아낙의 등짝, 거리낌 없이 훤하다

그 부끄러움 추스를 새도 없이

주섬주섬 짐가방 챙겨든 모녀는 사라지고

궁색한 해우를 마친 촉촉한 자리에

수선스레 봄 햇살 무더기로 몰려와

춘곤에 겨운 목숨들 죄 깨워놓고야 마는,

 

 

김혜경: 충북 보은 출생, 한남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큰시>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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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자신의 색깔을 보이라

 

 

  이번 『시에』신인상에 투고된 150여 분의 1500여 편의 시를 읽으면서 시가 죽었다는 말은 한낱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만큼 투고작이 풍성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뼈를 깎는 듯한 가열한 열정의 흔적들과 조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현대시가 산문성으로 치우쳐 있다는 것은 우려할 만한 일이라 선자들은 동의했다. 시대 자체가 엄연한 산문의 시대라는 사실은 부인 할 수 없지만, 장광설이나 요설이 아닌 산문시 자체의 밀도 있는 구조적인 조형력과 운율, 시적인 상상력과 언어 감수성 회득에 실패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회부된 투고자는 총 10분이었다. 선자들은 무엇보다도 박기임, 김현희, 변가영, 김기화, 송정현, 변영희, 김혜경, 김인수, 나종훈, 홍선영 등의 시편들을 깊이 있게 정독했다. 그들은 각기 시적인 대상을 나름의 감각과 사유로 형상화하는 능력을 갖추고는 있었으나 몇몇을 제외하고는 새롭다는 면에서 일정부분 한계를 안고 있기도 했다. 특히 젊은 투고자들의 경우 절제력 있는 언어 구사력 보다는 대개는 요란한 말장난이나 넋두리를 늘어놓기 일쑤였다. 여타의 장르와는 달리 시는 생략을 통한 행간의 여백을 극대화하거나 이미지를 변용하여 확장해 나갈 줄 아는 언어 운용력이 불가피한 장르다. 따라서 굳이 장황한 언표가 필요했다면 거기에는 분명 합당한 동인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선자들은 일차적으로 선별된 박기임, 김현희, 변가영,의 시를 주목해서 읽었다. 이들의 시편들은 일상적인 사물이나 현장에서 포착한 정서를 아무런 무리 없이 구상화하는 이미지 현상력이 돋보였지만, 대체적으로 단순한 상상력으로 인해 도식적으로 떨어져 버리는 난전도 간과하기 어려웠다. 시적인 대상을 부조하는 능력에 비해 그 대당에서 새로운 발견의 눈이나 탄력적인 언어 운용 능력이 요구된다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마지막 경합에서 선외로 밀려난 만큼 좀더 참신한 언어와 깊이 있는 사유의 접점을 찾는 수련에 공력을 기울인다면 분명 시단에서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최종적으로 당선권에서 거론된 변영희, 김혜경, 김기화의 시편들은 각기 일장일단과 선자들 간의 이견이 있어 취사선택의 진통을 겪었다. 변영희의 시편이 활달하면서도 웅숭깊은 언어 운용을 통해 아이러니한 삶의 이면을 감지하는 눈길이 예사롭지 않았다면, 김혜경의 시는 아주 비극적 세계 인식에서 건져 올린 언어가 곡진한 페이소스로 다가왔다. 김기화의 시편들 역시 은유적 알레고리라 명명할 수 있는 해석적 결구가 돋보였다. 그러나 이들의 시편에서 이미지를 응집하여 확산해 내는 입체적인 사유의 진폭이 과제라고 선자들은 생각했다. 이들의 무르익은 시적 발상이 삶에 대한 새로운 통찰로까지 확대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덜어내기 어려웠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난상토론을 거치며 조율한 결과 그들의 시가 여타의 신인상 수준을 넘어서는 만큼 세 분을 모두 시단에 내보내기로 최종적 합의에 도달했다. 세 분 모두가 머지않아 선자들의 기우를 떨쳐낼 만한 시인으로서의 자질과 덕목을 고루 갖추었다고 판단한 까닭이다. 마지막으로 선자는 시인이라는 천생의 미덕과 열정을 겸비하고 있는 이 도전적인 신예들의 출현을 각별히 주목하고 싶다. 하나의 시인으로 태어나기 위해서 그들은 얼마나 무섭도록 외로운 불면의 밤을 지샜을 것인가.

그러나 그보다도 하나의 시인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또 얼마나 더 참혹한 고독의 시간을 견뎌야 하는 일인가를 축하의 말 대신 빙점으로 남기며 조용히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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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시위원 : 공광규 양문규 강희안

출처 : 푸른 시의 방
글쓴이 : 강인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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