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근 시인
군에서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그리 녹록한 편이 아니다. 생활 자체가 그렇지만, 순수문학인 시나 소설, 수필을 쓴다는 것은 더욱 쉽지 않다. 그런면에서 '호국문예'는 참 귀한 존재였다. 국방부에서 1980년인가부터 전 국민을 대상으로 장시를 모집하고 기타 장르에 대해서도 공모를 하였다.
당시 공모에 응모하여 장시 부문에서 2회와 5회에 가작을 했다.(당선 1명, 가작 2명정도). 상금으로 각각 30만원을 받았는데 당시로서는 나에게 큰 돈이었다. 당시 중위였던 내 봉급이 대략 13-4만원 정도를 받았으니, 봉급의 두 배를 상금으로 탄 것이다. 그리고 1997년도에 시부문에 당선이 되어 당시는 상금으로 150만원을 받았다. 군에서 시를 쓴다는 것은 발표 지면이 별로 없는 가운데 호국문예는 좋은 발표의 통로였고, 유일한 돌파구였다. 간혹 국방저널이나 국방일보에 기고하였지만, 그것은 검증을 받을 기회가 아니었으므로 그래도 매년 공모하는 그 '호국문예'가 당시로서는 좋은 기회였다.
2회인가에서 심사는 작고하신 정공채 시인께서 해 주셨다. 5회때는 역시 작고하신 구상시인께서 심사를 해 주셨다. 2회 당선 시인은 조선일보외 신춘문예를 동시에 당선하신 허일 시조시인 이셨다. 그 이후 여러 번 만나 많은 조언과 격려를 해 주신 고마운 분이다. 전방에 근무하면서 아직 등단하지 못한 본인에게 여러가지 문단의 이야기도 해 주시고, 활동을 격려해 주셨다. 그 초창기 시절, 전방 철원에 근무하던 병사가 시 부문에서 당선이 되었다. 그 시를 눈여겨 보면서 자주 읽었다. 그가 바로 윤성근시인이다. 그 이후 전후방 각지로 다니느라 문단에 대해서 그리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 2회때는 이순원 소설가를 시상식에서 보았다. 그는 소설에서 당선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이후 그의 이름은 지상에서 가끔 들었고 소설을 아주 잘 쓰는 소설가로 기억하고 있다.
윤성근 시인이란 단어가 신문에 나왔을때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라고 느꼈다. 당시는 장시를 잘 쓰는 병사로 기억하고, 그 장시의 표현을 가끔 되뇌이기도 했는데, 잊고 있었던 이름을 신문에서 보다니. 그리고 그것도 바로 부음 소식이라니. 나보다도 나이가 젊은 그 시인이 그렇게 가다니. 참 세월은 순서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재삼 느끼는 일이다.
그렇게 한동안 시를 잘 써보겠다고 하던 시간도 순식간에 지나고 이제는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다. 좀 더 치열하게 살고, 깊이 노력했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나았겠지. 하지만 나름대로 이 분야에서 열심히 살려고 한 시간을 후회하고 싶지는 않다. 언제나 주어진 분야의 일에 열심히 하려는 마음의 자세로 임해 왔다고 생각한다. 가끔 그 끈이 느슨한 적도 없지는 않다. 그리고 근무하면서 그런시간을 아쉬워 해 본 적은 있다. 그 때 좀 더 최선을 다할 것을 하면서.... 시를 쓰는 일은 그 때보다 별 진전이 없는 것 같다. 늘 혼자 쓰고 그리고 밀쳐두고, 외로우면 끄적거리고, 시는 그저 좋은 친구였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던 지난 군 생활. 그 전방의 관사나 훈련장에서 간혹 메모를 하면서 시를 끄적 거렸다. 시를 쓴다기보다 끄적거린다는 표현이 더 적당할 것 같다.
치열하게 살다간 사람들은 그 정열적으로 살다간 흔적이 잘 남는다. 그리고 일찍 떠났다. 아쉬운 점은 좀 더 천천히 건강을 조금 생각하면서 했다면 더 좋은 글, 더 좋은 작품을 더 많이 남길 수 있었을 것인데 하는 아쉬움이 크다. 시간이 그것을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재능이 안타깝다.
오늘 아침 신문을 보면서 잊고 있었던 시인의 이름 하나를 다시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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