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꽃이 핀다
서 정 문 / 수 필 가
꽃이 핀다. 꽃향기가 사방으로 번진다. 세상이 환해지고 아름다워진다.
대개는 잎이 먼저 돋아나고 꽃이 피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꽃이 피었다가 지고 나서야 잎이 돋아나는 식물도 있다. 공항을 가다가 화들짝 놀랐다. 잎 없이 붉게 핀 꽃들이 온 화단을 덮고 있는 모습 때문이었다. 녹색의 잎 하나 없이 꽃만 피어난 그 풍경은 느낌표를 일렬로 세워둔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았다. 늘 꽃과 잎이 어우러진 모습에 익숙하기 때문일까. 단색의 강렬한 색을 통해 어떤 마음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었을까.
꽃이 핀다는 것은 불을 밝히는 일이다. 세상을 향해 미소를 보내는 것이다. 왜 계절은 봄을 오게 하고 다시 꽃을 피우게 하는가. 겨우내 움츠리고 막힌 가슴을 꽃으로 풀어주려고 함이 아닌가. 희망을 주려고 함이 아닌가. 봄꽃이 다가온다. 노란 수선화와 흰 수선화가 은은하게 다가오고, 목련이 담백하게 피어난다. 햇살이 깊어지면 유채꽃이 곳곳에서 향기와 함께 오고, 무꽃이 보랏빛 웃음을 피운다. 제주도이기 때문이리라. 곳곳에 자생하는 유채와 무꽃들이 무시로 핀다. 무리 지어 피면서 함께 바람에 일렁인다.
제주도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마을. 유채꽃이 노랗게, 노랗게 물이 드는가 싶으면 벚꽃도 움을 틔우기 시작한다. 이윽고 벚꽃이 만개하고 유채꽃 향기가 온 들판과 길옆에 가득하게 날린다.
작년에는 코로나로 인해 유채꽃이 꽃봉오리가 맺히기도 전에 갈아 엎어졌다. 육중한 트랙터의 톱날 아래 산산이 부서져 그 연한 가지를 땅에 묻어야 했다. 그렇게 기다리기를 일 년. 어김없이 봄은 오고 꽃은 노란 꽃망울을 다시 터트리기 시작했다. 왜 두렵지 않았겠는가. 작년처럼 육중한 트랙터의 칼날에 잘려 나가는 게 아닌가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올해는 그렇게까지 잔인하지는 않았다. 사람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자칫하다가는 아예 꽃을 볼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일까 가까이 모이지 않고 천천히 간격을 띄워가면서 꽃을 즐긴다. 유채꽃 축제가 취소되지 않고 열렸다는 것 자체만으로 의미가 있다. 야외에서 바람을 맞으며 유채꽃과 대화를 나누며 함께 공감할 기회가 생겨 다행이다.
겨우내 산에 있는 듯 없는 듯했던 나무가 하얀 꽃을 등불처럼 피운다. 꽃이 피어나기 때문에 거기 나무가 있음을 알게 된다. 저 꽃이 지면 나무는 다시 숲 사이에서 긴 기다림에 들어갈 것이다. 잎을 틔우고 가지를 추스르면서 다시 꽃을 피울 준비를 할 것이다. 더 많은 꽃을 피우기 위해 가지를 뻗어보고 팔도 흔들어 볼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준비하고 교육받고. 건강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닌가. 무수한 사람들 사이에서 드러나지 않으면서 소리없이 기다리다가 어느 봄날, 때가 오면 그 기개를 펴고 화려한 꽃을 피우지 않겠는가.
사람을 키우고 교육하고 다듬는 것이 바로 한 그루의 나무를 심는 것이 아닌가. 막 자라게 두면 결국 땔나무가 될 것이며, 다듬어 추스르고 키우면 좋은 재목도 되고, 값비싸고 가치 있는 나무가 되지 않겠는가. 해마다 나무 한두 그루를 심고 가꾼다. 살아가면서 위안을 받고 싶어서 나무를 심고, 나중에 이 나무가 자라서 누군가의 좋은 그늘이 되고, 맛있고 튼실한 열매를 맺어 준다면 그 또한 얼마나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제주에 와서 살면서 깨닫는 것은 천혜의 자연환경 덕분에 나무가 절로 잘 자란다는 것이다. 비옥한 땅과 적당히 내려주는 비, 강렬하고 뜨거운 태양의 풍성한 빛, 바다를 건너오는 잔잔한 바람까지. 흔들리지 않고 자라는 나무가 없듯, 제주엔 알맞게 등을 떠밀어주는 바람과 햇살과 비가 나무를 쑥쑥 자라게 해 준다. 튼튼하게 맘껏 사방으로 자랄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준다.
화르르 화르르 벚꽃이 우박처럼 내린다. 분홍빛 축제가 온 길에 가득해진다. 저 봄꽃이 지면 다시 화사한 여름꽃이 우리를 맞을 것이다. 계절마다 꽃이 피는 자리. 거기 내가 서 있다. 둘러보면 꽃 피어나지 않는 곳이 없다. 여기, 다시 꽃이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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