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에서 기초군사반 교육을 받고 초임지로 배치된 곳이 바로 한탄강과 임진강이 마주치는 곳이었다. 임지로 도착한 날, 당시 대대장님은 직접 여단까지 오셔서 지프차에 나를 태우고 한탄강가의 공사현장으로 데려다주었다. 강가 언덕에서 흘러가는 한탄강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때가 9월 어느 날. 그날 점심식사시간에는 환영한다며 맥주잔에 소주를 가득 부어 주었다. 단숨에 마셨다. 생애 처음 마셔본 소주였다. 쓴 맛이 오래 남았다.
건물만 달랑 지어진 막사, 한 달여 후에 거기 한 곳에 베니어판을 깔고 병사 이십여 명과 공사판 생활이 시작되었다. 현장을 감독하고 지원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한 달 후에 부대가 정식으로 창설이 되었다. 다시 산골짜기에 있는 부대로 거처를 옮겼다. 독신자 숙소는 부대 막사 한편에 지어져 있었고, 숙소 옆에는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어느 날 철조망 너머로 갈 일이 생겼다. 작은 마을로 들어가는 동네 입구로 들어서니 바로 거기 고인돌이 떡 앉아 있었다. 고인돌을 둘러싼 철제 울타리는 누구나 타 넘을 수 있을 정도로 낮았다. 동네라야 고작 일곱, 여덟 집도 되지 않는 산골. 거기다 집은 띄엄띄엄 있었다. 내 숙소의 방과는 지척인 장소에 고인돌이라니. 그날부터 자주 고인돌을 찾게 되었다. 청동기시절의 어느 힘 있는 사람이 이 근방 어딘가에 살았으리라 짐작도 해보았다. 내가 지금 사는 곳이 혹시 그 사람이 살던 곳은 아니었을까? 그런 상상도 해보고, 그 오래 전에 걸었을 그 길들도 다시 더듬어보곤 하였다.
해가 서산으로 지는 때, 노을이 붉은 하늘을 보면서 차츰 검게 변하는 산을 바라볼 때면 아릿한 향수 같은 것도 더 느껴야 했다. 그런 때면 고등학교 음악시간에 배우고 불렀던 가곡들을 하나 둘 불러보았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고, 메아리도 없는 산골 저녁에 대고, 우렁우렁 노래를 불렀다. 어쩌면 저 고인돌의 주인공은 거기 어느 곳에서 그 노래를 들어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외로움은 늘 어둠과 함께 다가왔고, 그 시간이면 검게 앉은 고인돌이 더 정겹게 느껴졌다.
그리고 군 생활을 오래 하면서 전곡에도 근무하게 되었고, 훈련을 할 때 파주 지역도 다녀보면서 고인돌이 연천, 전곡에도 있고 임진강을 따라 파주에도 많이 분포된 것을 보게 되었다. 구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자리 잡고 살았을 전곡. 그리고 바다까지 이어지는 임진강. 그 주변에 집을 짓고 살았을 오래 전의 사람들. 그들이 다녔을 길과 흔적들을 생각하면 당시 다녔던 길도 예사로운 길은 아니었다.
그들이 걸어 다녔을 길, 그 작은 모퉁이들도 훨씬 정겹게 여겨졌다. 임진강과 한탄강이 만나는 지역, 그 강가에서 야간 매복을 서면서도 밤이 서글프지 않았다. 장마가 진 강을 따라 북에서 무장공비가 내려오고, 참호 속에 무릎까지 물이 찬 밤에도 꼼짝하지 못하던 시간들. 그리고 그 무장공비가 낮은 논둑에서 발견되어 어느 병사에 의해 사살되었다던 날들도 모두 그 주변에서 이루어졌다.
아주 오래전 역사 속에는 이념도 사상도 없었으나, 인류는 단순하게 먹고 자는 것보다 더 의미 있는 무엇을 갈망했다. 어쩌면 더 인간답게 살고, 더 근본적인 것을 추구하는 열망 때문일까. 현실 안주보다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더 요구하는 것일까. 현실은 시간이 지나면 바로 역사가 된다. 빠르게 변화하는 현재를 살면서 정체성을 갖고,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이며, 어떻게 살아야 올바르게 사는 것인가를 생각해보는 것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현재가 다소 혼란스럽더라도 그 속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과 하고자 하는 일들을 그려본다면 지금의 시간은 너무 소중한 것이 아닐 수 없다. 현재가 쌓여서 바로 나의 역사, 우리의 역사가 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 | 서정문 칼럼니스트 ㅣ 시인, 수필가 / 정치학 박사 |
연성대 겸임교수, 전 성결대 외래강사 육군 대령 전역, 한미연합사, 국방부, 주 자유중국(대만) 대사관 연락관 근무, 연대장 시인, 수필가, <우리문학> 및 <한국수필> 등단 국제펜클럽 이사, 한국문인협회, 현대시인협회 회원 전쟁문학상, 화랑문화상, 국방부 주관 호국문예 시 당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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