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지, 신문, 동인지 등 발표된 작품들

호로고루 엉겅퀴-2015 한국수필 등단작

지도에도 없는 길 2016. 1. 11. 22:01

 

호로고루 엉겅퀴

-서정문

 

엉겅퀴가 피는 계절이면 호로고루를 찾아간다. 무엇보다 기쁜 것은 호로고루의 엉겅퀴가 다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서울에서 한 시간 반 정도 북으로 차를 달리면 도달할 수 있는 곳. 임진강을 왼편에 끼고 있는 곳에 호로고루가 있다. 잘 가꿔진 잔디 너머로 엉겅퀴가 다시 보랏빛 꽃을 피우고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꽃들도 모여 피면 더 아름답다고 했던가.

임진강이 고랑포를 지나 한강으로 흘러가는 길목, 호로고루는 그 자리에 있다. 성벽에 올라 북쪽을 쳐다보면 멀지 않는 곳에 비무장지대가 이어진다. 나즈막한 능선이 동에서 서로 펼쳐져 있고, 그 산 자락 아래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무덤도 있다. 6·25 전쟁 때 북한군의 전차가 임진강 단애를 피해 겨우 강을 도강했다는 고랑포도 바로 지척이다. 한때는 개성인삼의 집산지로 우리나라 최초의 백화점인 화신백화점분점이 있었던 고랑포 일대는 지금 민통선의 경계지역이 되어 있다.

이렇듯 전술적인 요충지에 고구려의 성인 호로고루가 있다. 이 성은 고구려 성의 특징인 평지성으로 흙을 모아 축조되었다. 지금도 붉은 와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당시 성 앞에 여러 채의 건물도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얼마 전 토지공사에서 성 앞 넓은 곳을 발굴하다가 집터의 흔적을 많이 발견하였다고 한다.

군에 있을 때 새로운 지역으로 부임하면, 우선 지형부터 익혀야 했다. 지형연구를 하면서 지도를 찾아보았을 때 가장 관심을 끈 이름이 바로 호로고루였다. 다소 생소한 이름이면서도 그 이름이 주는 운율이 감칠 맛을 더해주었다. 이 지역에서 오래 근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호로고루가 어디에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그러나 위치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름은 들어본 적은 있다거나, 어디쯤에 있다는 것 정도만 들어 보았다는 것이다. 직접 지도를 들고 성을 찾아 나섰다. 임진강을 건너 북으로 가면서 좁은 농로로 접어들었다. 한참을 가도 성 비슷한 것이 나오지 않아 마침 밭일을 하고 있는 농부에게 물어보았다. ‘성은 이 농로를 따라가다가 막다른 길 쯤에 있다고 했다. 그가 가리키는 곳으로 따라 걷다가 성의 입구를 알리는 조그마한 간판을 발견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보니 저 앞에 작은 능선 하나가 놓여 있었다.

성은 그리 높지 않는 둔덕처럼 보였다. 성의 입구에 들어서자 먼저 반겨준 것은 보라색 꽃을 한창 피우고 있는 엉겅퀴였다. 성벽 앞 돌 무더기에도 꽃이 만발하였다. 심지어는 성벽의 경사면과 위에도 온통 키가 큰 엉겅퀴 밭이었다. 흡사 고구려의 키 큰 병정들이 창을 들고 성벽위에 서서 보초를 서고 있는 듯, 줄지어선 꽃대들의 위용이 대단하였다. 오랜 시간 성을 찾는 사람들이 없자, 엉겅퀴들은 마음놓고 자리를 잡아 꽃을 피우고 있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엉겅퀴를 본 적이 없어서 그 날은 종일 흥분되고 오래된 보물을 혼자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 후에도 가끔 전방을 찾을 때면 호로고루에 올라 엉겅퀴를 보고 임진강의 노을도 감상하면서 고구려의 웅혼한 기상을 느껴보곤 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 엉겅퀴꽃이 필 무렵 다시 호로고루를 찾았을 때 성은 정비 중이었다. 입구가 차단기로 막혀져 있고, 성으로 들어가는 입구부터 공사가 한창이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 많던 엉겅퀴들이 사라졌고, 성벽도 모두 파헤쳐져 있었다. 성벽에는 잔디를 입히고 있었으며 엉겅퀴의 자취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정비를 하면서 성을 그대로 살릴 수는 없었겠지만, 그렇게 자연적으로 자라고 꽃을 피우던 엉겅퀴가 없으니 성은 황폐해진 듯하였다. 성을 한껏 운치있게 만들어주던 야생화가 사라지자 고구려의 기상도 함께 사라진 듯하여 씁쓸하기 그지 없었다. 혹시 남은 엉겅퀴가 있는가하고 성벽을 둘러봐도 그 꽃은 한 포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게 엉겅퀴가 사라진 다음 해에도 엉겅퀴꽃이 피는 계절이면 호로고루를 찾았다. 이제는 잘 단장된 진입로와 안내간판, 그리고 성벽에는 잔디가 잘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져 있었다. 어디서 날아온 씨앗인지, 아니면 그 파헤쳐진 성벽의 깊숙한 곳에 뿌리를 박고 있었는지, 새로 정비한 지 삼 년째 되는 해에 다시 엉겅퀴꽃이 소복하게 피어 있는 것이다. 성벽으로 오르는 난간대 옆은 온통 꽃으로 뒤덮여 있었고, 성벽 위에도 듬성듬성 꽃들이 피어 있었다. 이제 내년이면 이전처럼은 되지 않아도 성벽을 가득 메울 만큼의 엉겅퀴들이 자랄 것으로 보였다.

성벽 앞 능선 너머에는 우리 젊은 병사들이 24시간 적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다. 비무장지대를 따라 밤새 경계근무를 서고 있다. 키가 큰 젊은 병사들은 흡사 키 큰 엉겅퀴처럼 한시도 자리를 비우지 않고 적을 응시하고 있다. 그 후방에서 임진강을 지키고 선 호로고루의 엉겅퀴. 성벽에 기대어 보초를 서던 고구려 병사에게 친구가 되어 함께 밤을 새워주던 것처럼, 지금 저 엉겅퀴는 밤새 보초를 서는 병사들의 어깨에 아름다운 야생화의 향기를 전해주고, 함께 서서 밤을 새워주는 벗 같은 꽃이 아닌가.

성벽에 올라 유유히 흘러가는 임진강의 푸른 물줄기를 본다. 절벽을 끼고 돌아가는 도도한 강물은 성벽이 있는 이 앞자락에서 빠르게 지나가면서 고랑포 굽이에서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흐른다. 저만치 굽어가며 휘돌아가는 강물 줄기. 그 강을 지키며, 강을 가슴에 껴안으며 서 있는 호로고루. 그 성을 단장하고 풋풋하게 일으켜 세우는 꽃, 엉겅퀴. 그 야생화가 지천에 다시 필 날을 그리며 성벽에 다시 서 본다. 임진강 노을이 천천히 강줄기를 물들이기 시작하는 때, 막 피어난 성벽의 엉겅퀴꽃들도 일제히 꽃대를 흔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