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길을 함께 걷다
-안동문학기행을 다녀와서
서정문
어딘가로 떠나간다는 것은 설레임의 시작이다. 파란 하늘이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가을날, 양반의 도시인 안동으로 떠나는 여행은 더없는 기대감을 가져다주었다. 안동은 스스로 ‘정신문화의 수도’라고 부르고 있다. 회원 중에는 안동길이 처음인 분도 여럿 있었다. 그들의 표정에는 안동에 대한 호기심으로 설레는 마음이 역력하였다.
서초구청 주자창에 드디어 버스가 도착하였다. 회원들은 모두 차에 올랐고, 인원을 점검하였다. 역시 어디나 여럿이 움직이면 늦게 오는 사람이 있기 마련. 장회원님만 도착하지 않았다. 사진사로 봉사해 주는 선생님을 우리는 한참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기다린 보람이 있어 나중에 우리는 안동에서 장회원님의 지인인 홍경숙 시인한테서 백설기 떡을 받았다. 덕분에 장 회원의 멋진 사진도 여러 장 얻을 수 있었다.
이윽고 출발, 차는 경부고속도로를 지나 영동고속도로, 다시 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갔다. 국도를 타고 가다가 천등산 휴게소에서 잠시 목을 축이고, 시원한 가을바람으로 가슴을 채웠다.
서안동 인터체인지에서 내려 바로 영호루로 향했다. 영호루에 도착하여 차에서 내리니, 주차장의 큰 나무들은 벌써 노랗고 빨간 단풍으로 물들어 가을빛이 완연하였다. 사진 몇 장을 찍고, 누각에 올라 안동시를 바라보고, 흘러가는 낙동강의 너른 물줄기를 보았다.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는 강변이 온통 미루나무 밭이었고, 백사장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동안 강도 많이 변해 있었다. 영호루 누각에 올라 강 감사님의 친절하고 해박한 해설에 귀를 기울이면서 옛 선인들이 남긴 한시를 음미해 보기도 했다. 이름만 들어도 익히 알 듯한 분들의 한시가 누각에 빼곡하게 걸려 있었다. 공민왕의 친필이라는 한자 현판,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이 쓴 한글 현판. 영호루의 누각에서 그렇게 옛 것을 다시 생각해보며, 안동의 풍경을 찬찬히 눈에 담아 보았다.
차는 다음 목적지인 임청각으로 향했다.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임청각 앞에는 7층 전탑이 서 있었다. 전탑 앞에서 우리는 철로가 임청각 집을 가로질러 버린 것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일제가 조선을 점령하여 통치를 할 때, 조선의 정기를 잘라 버리기 위해 임청각을 반 토막 내어 철로를 건설하였다는 것이다.
임청각 뜨락에는 가을볕에 모과가 노랗게 익어가고 있었다. 가지런하게 놓인 툇마루의 호박, 그리고 모과 몇 개는 한 폭의 정물화가 아닐 수 없었다. 임청각 뒷 담 아래에 있는 몇 그루의 모과나무 아래는 떨어진 모과들이 지천이었다. 몇 개를 주워들고 냄새를 맡아보며 가을의 정취를 느껴보기도 했다. 그리고 독립운동을 하기위해 재산을 팔아 만주로 떠났다는 집 주인의 정신과 기개를 되새겨 보았다. 이제 2년이 지나면 철로는 영주에서 안동을 우회하여 새롭게 건설된다고 한다. 철길이 다시 놓이면 서울 청량리에서 안동까지 KTX로 1시간 20분이면 도착한다고 하니, 교통 오지 안동도 서울과 일일 생활권이 될 날도 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되어 본래 임청각이 가진 정기가 다시 이어지기를 기대해 보는데, 화물열차 한 대가 우르릉 소리를 내면서 임청각 담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 도착하니 강 감사님한테서 전화가 왔다. 아, 감사님을 빠뜨리고 차가 출발한 것이었다. 해설을 멋지게 해주신 강 감사님께서 임청각을 더 둘러보고 있었던 것을 알지 못하고 버스를 출발시키고 말았다.
안동시인 홍경숙님의 승용차를 빌려 부랴부랴 임청각으로 갔다. 감사님은 강변길을 혼자 걸어오고 있었다. 차에 태워 드렸더니, 호젓한 가을 강변길을 음미하며 걸었노라고 하셨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식당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단다.
점심 메뉴는 간고등어 정식이었다. 행여 간고등어를 좋아하지 않는 분들이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했던가. 모두들 맛있게 먹었다는 인사를 들어서 다행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일행들은 모두 식당 앞에 있는 월영교를 건넜다. 강바람이 불어오는 다리를 건너면서 월영교가 전해주는 이야기도 들었다.
안동댐 바로 아래 조정지댐을 가로지르는 월영교(月映橋). ‘달빛이 비친다는 뜻’의 이 다리에는 조선시대 남편과 사별한 ‘원이엄마’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고성 이씨 집안 며느리인 원이엄마는 남편 이응태가 1586년 31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자 남편의 관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끊어 만든 미투리와 함께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을 담은 한글 편지를 넣었다. 관에서 나온 미투리 모양을 본떴다는 월영교는 길이 387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나무다리다. 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이어진 안동호반 나들이길은 강을 보며 걸을 수 있는 명품 산책길이다.
일부 회원들은 다시 석빙고로 올라가고, 더러는 강변길을 따라 산보를 하면서 가을 정취와 안동의 오랜 기품을 함께 느끼는 시간이 되었다. 발길 닿는 곳은 다 길이던가. 길이 너무 좋아 길에 홀린 것일까. 하회마을로 출발하려는 버스에 여러 명이 보이지 않았다. 전화를 걸어 확인하니 건너편 주차장에 여러 분이 모여 있다고 하였다. 거기까지 버스를 끌고 갔는데 거기서도 두 명의 회원은 보이지 않았다. 다시 전화로 확인하니 ‘어딘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골프장이 보이고, 언덕을 넘었다’고 했다. 버스로 다시 강기슭을 따라 능선을 올라 유교랜드 앞까지 가서 빙 돌아가 보았지만 그래도 보이지 않았다. 택시를 타고 오라고 하려는 찰라, 저 길 건너편에 두 사람이 보였다. 두 분은 이야기에 젖어, 가을빛에 젖어 일행들이 보이지 않아도 계속 산길을 걸어서 그 먼 곳까지 왔다는 것이다.
버스는 풍산을 지나 병산서원 길로 들어섰다. 이윽고 비포장도로가 나타나고, 마주 오는 승용차를 좁은 길에서 만나 잠시 멈추고는 병산서원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병산이 병풍처럼 강변에 서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너른 백사장은 맑은 강물을 가슴에 안고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익어가는 가을 모과의 노란빛깔이 더 없이 고운 오후, 우리는 병산을 마주보는 곳에 자리잡은 병산서원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병산서원의 마루에 앉아 앞에 보이는 대청마루를 일제히 바라보았다. 벽 없이 기둥만 세운 대청마루. 자연을 막힘없이 바라보라고, 병산의 풍경을 가슴 가득 담아두라고, 벽을 만들지 않았다는 선조들의 혜안에 어찌 감탄하지 않겠는가.
사당 앞 둥치가 큰 배롱나무는 바로 세월의 흐름을 깨닫게 해 주었다. 이제까지 그렇게 큰 배롱나무를 본 적이 없다. 비스듬한 곳에 서서 단단하게 몸을 세우고, 붉은 꽃을 백일동안이나 피워내는 나무. 선비들은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들에게 ‘저 꽃이 세 번만 피면 배 불리 먹을 수 있다’고 하였단다. 배롱나무꽃이 세 번 피면 벼 추수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 선조들은 자연의 변화를 보면서 시간을 헤아리는 섬세한 관찰력이 깊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버스는 다시 이번 여행의 최종 목적지인 하회마을로 향했다. 임진왜란 때, 당시 영의정으로서 선조를 모시고, 전란을 슬기롭게 헤쳐낸 서애 유성룡이 벼슬에서 물러난 후 있던 곳이다. 서애는 전란 후 고향으로 돌아와 후세 사람들에게 ‘징비록’이란 책을 남겨 주었다. 마을 입구에서 내려 입장료를 내고 안으로 들어가 셔틀 버스를 기다렸다. 셔틀버스는 채 10분이 안되어 우리를 마을 입구에 내려 주었다.
가을이 깊어가는 마을 주변. 마침 쓰러진 벼를 일으켜 세우면서 벼를 베는 농기계를 유심히 보았다. 농부는 연신 쓰러진 벼를 세워가며 기계를 움직이고 있었다. 회원 한 분이 “거름이 너무 많아서 키만 커서 벼가 쓰러진 거야” 라고 하였다. 그렇다. 다른 논의 벼들은 대궁이 튼실하여 모두 꼿꼿하게 익은 벼를 매달고 서 있었다. 필요 이상으로 키만 크고 몸이 단단하지 않으면 저렇게 쓰러지고 마는구나 싶었다. 오른쪽 논에는 잎이 말라가는 연잎들. 한 때 꽃을 아름답게 피웠던 꽃 대궁들이 말라가면서 갈색의 연밥을 이고 서 있었다. 줄기는 말라가도 씨앗을 품고, 다시 때를 기다리며 시간의 흐름을 받아들이는 것일까. 동네골목마다엔 오래된 감나무에 주황색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저녁노을이 조금씩 골목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시간, 한 사람이 감나무에 올라 쪽대로 감을 따고 있었지만, 감은 쉽게 익은 몸을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서울로 가는 시간이 촉박하여 강변을 끼고 돌아나오는 벚나무 길은 다음으로 미루고, 왔던 골목을 되돌아 나왔다. 서울행 버스는 어둠속을 달려 죽전 간이휴게소에 몇 분의 회원들을 내려 주고는 다시 종착지를 향해 달렸다. 예정된 시간보다 삼십분 정도 늦게 서초구청에 도착하였다. 아쉬움을 남긴 채,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하루 동안 더 정이 든 서로에게 다정한 말을 남기고 헤어졌다.
이번 안동 문학기행은 옛 것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안동의 선비정신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그 중에서 특히 가슴에 남는 것은 병산서원. 하회의 초입에서부터는 포장되지 않은 길이었다. 모두가 포장된 길인데, 이 길은 아직 비포장도로였다. 그래서 더 옛날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서원 곳곳에 서 있던 오래된 목백일홍. 그 긴 세월동안 건너편 병산을 쳐다보며 때마다 붉은 꽃을 피워내고 있는 그 모습이 새삼 진하게 가슴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껍질을 벗겨도 겉과 속이 다르지 않다는 나무. 그래서 ‘선비들의 나무’라고 불리어졌다고 한다. 늘 작은 배롱나무들만 보다가 그 웅장한 줄기와 대궁들을 보니 절로 세월의 무게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일 기행은 아무래도 아쉬움이 더 남는 것 같다. 그러나 다시 내년 봄을 기약하면서 어둠이 깃든 서울, 서초로 돌아왔다. 평생을 책을 벗삼고, 책 속에서 내일을 찾아온 선조들, 그리고 수려한 산세와 자연에서 그 깊은 뜻을 헤아리며 글을 쓰고 남긴 오래 전 안동 선인들의 향기를 듬뿍 느낀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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