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화공주와 미륵사지 석탑
서정문의 역사칼럼
선화공주와 미륵사지 석탑
칼럼 ㅣ 서정문 칼럼니스트 ㅣ 2018년 08월 16일 (목) 14시 49분 33초 |
평범한 백제 청년 서동은 신라의 선화공주와 결혼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가 생각해 낸 방법, 스스로 만든 노래 한 곡을 신라의 수도 경주에 퍼뜨린다. 이 노래로 인해 신라의 선화공주는 아버지인 왕에게 쫓겨난다. 그리고 서동을 따라 백제로 가서 그와 결혼한다. 훗날 서동은 백제의 왕이 된다. 그가 바로 백제의 무왕이다. 왕위에 있을 때, 화려하고 웅장한 사찰 미륵사를 세운다.
그러나 목재로 지어진 건축물은 모두 불에 타거나 무너져 볼 수 없고, 무너진 채 남아 있던 석탑만 확인할 수 있다. 석탑은 조선시대 이후 반파, 콘크리트에 덧씌워진다. 그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이 20여 년간의 수리작업을 마치고 일반 공개된다.
미륵사지 석탑은 미륵사에 있던 3개의 탑 중 서쪽 영역에 위치한 석탑으로, 현존하는 석탑 중 최대(最大) 규모이며 백제 목조건축 기법이 반영된 독특한 양식의 석탑이다. 지난 2009년 1월 석탑 해체조사 과정 중 1층 내부 심주석에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발견, 학계와 불교계 등 국민적 관심을 받는다. 이를 통해 석탑의 건립시기(639년), 미륵사 창건의 배경과 발원자 등이 밝혀진다.
사리장엄구가 발견되기 이전에는 신라에서 온 무왕의 비인 ‘선화공주가 시주하여 건립한 탑이 바로 미륵사지 석탑’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석탑 해체 과정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에서 절이 세워지게 된 이유를 기록한 금판이 발견된다. 사리장엄구에는 ‘백제 왕후가 재물을 희사해 가람(伽藍)을 창건하고, 기해년(639년)에 사리를 봉안해 왕실의 안녕을 기원한다’라고 적혀 있다. 금제봉안기에는 시주자인 왕후가 백제 8대 귀족성 중 하나인 ‘사’ 씨(沙氏 또는 ‘사택’ 씨)의 딸로 기록돼 있어 ‘선화공주가 미륵사지를 조성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차이가 난다.
역사는 사료를 중심으로 해석되고 평가되지만, 확실한 기록이 출토되거나 등장하면 새로 해석된다. ‘서동요’로 유명한 선화공주와 백제 무왕의 이야기와 더불어 선화공주가 시주했다던 미륵사. 절의 창건 시 시주자가 ‘사택’ 씨라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또 다른 방향으로 역사는 평가된다.
![]() | 서정문 칼럼니스트 ㅣ 시인, 수필가 / 정치학 박사 |
연성대 겸임교수, 전 성결대 외래강사 육군 대령 전역, 한미연합사, 국방부, 주 자유중국(대만) 대사관 연락관 근무, 연대장 시인, 수필가, <우리문학> 및 <한국수필> 등단 국제펜클럽 이사, 한국문인협회, 현대시인협회 회원 전쟁문학상, 화랑문화상, 국방부 주관 호국문예 시 당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