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에도 없는 길 2018. 10. 18. 16:29

서정문의 역사칼럼

공민왕과 놋다리밟기

칼럼 ㅣ 서정문 칼럼니스트 ㅣ 2018년 04월 30일 (월) 13시 59분 55초
 



어린 시절 집 앞 낙동강은 온통 은모래밭이었다. 강변에는 미루나무가 지천이었고, 갯밭에는 키가 큰 대마가 자라고 있었다. 여름이면 강변 모래밭에서 밤새 별을 보다가 잠이 들기도 했다. 그런 강, 낙동강의 상류는 해마다 여름이면 홍수로 난리를 겪어야 했다. 그때는 안동댐이 건설되기 전이어서 여름이면 태백산의 벌채된 나무들이 다리 아래로 무수히 흘러갔다. 돼지도 그 홍수에 떠내려가는 걸 여러 번 보았다.

 

그런 강은 홍수가 지나고 나면 온통 은모래로 강변이 채워졌다. 갯밭에는 태백산에서 흘러내린 신선한 황토로 가득 찼다. 동네에서 생산되는 무우가 맛 좋기로 이름난 것은 그 홍수가 큰 몫을 하였다.

 

그 은모래 강을 지역 부녀자들이 만들어 준 등으로 건넌 이가 있다. 고려 공민왕의 비인 노국공주였다. 왕비는 홍건적의 난을 피해 경북 안동으로 피난을 왔다. 강을 건너야 했는데, 이때 안동의 부녀자들이 강에 들어가 허리를 굽혀 사람 다리를 만들었다. 노국공주는 그 부녀자들이 자신의 등으로 만든 다리를 통해 강을 건넜다.

 

고려가 힘을 다해 갈 무렵인 공민왕 시절, 홍건적의 난을 피해 왕은 피난처를 안동으로 결정하였다. 어려울 때, 태조 왕건을 결정적으로 도와준 안동 사람들이 생각났다. 그래서 수도인 송도에서 멀었지만 안전한 곳이라 여긴 안동까지 피난을 갔다. 강 남쪽의 산 언덕 영호루에는 당시 공민왕이 썼다는 현판 글씨가 걸려 있다.

 

안동의 부녀자들은 나라가 어려워 피난을 온 공민왕의 비인 노국공주를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으로 놋다리를 만들었다. 지금도 안동의 축제 때는 그 놋다리밟기가 시연되고 있다.

 

이제 강은 댐으로 인해 늘 깊고 푸른 물로 가득하다. 저 강물의 밑바닥, 우리의 유년의 기억 속 강바닥은 늘 은모래가 천지였다. 강물은 흘러가서 다시 오지 않고, 역사는 흘러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 자리, 우리의 선조들이 살았고, 힘들었고, 어려웠던 자리는 여전히 그대로 남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다. 앞서간 조상들이 밟았던 자리, 그 자리를 밟는 발길이 어찌 무심할 수 있겠는가. 찬찬히 과거를 돌아보면서 선조들이 거쳐 갔던 그 자리를 지금 의미 있게 밟아보자.




서정문 칼럼니스트 ㅣ 시인, 수필가 / 정치학 박사
연성대 겸임교수, 전 성결대 외래강사
육군 대령 전역, 한미연합사, 국방부, 주 자유중국(대만) 대사관 연락관 근무, 연대장
시인, 수필가, <우리문학> 및 <한국수필> 등단
국제펜클럽 이사, 한국문인협회, 현대시인협회 회원
전쟁문학상, 화랑문화상, 국방부 주관 호국문예 시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