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그 아픔의 전쟁 1
조선은 1392년 건국된 이후 약 200년 동안 큰 사건 없이 평화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평화로운 시기일수록 전쟁을 잊지 말라는 말이 있으나 조선은 평화로운 시기를 누리기만 했을 뿐 전쟁에 대한 생각도 준비도 하지 않았다. 국방력은 약화되었으며, 국내 정치는 붕당정치로 파벌을 중심으로 정권을 다투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 예로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정사 김성일과 부사 황윤길의 보고도 파벌의 견해에 따라 서로 다르게 보고되었다.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00여 년간의 혼란을 끝내고 통일을 이루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군사를 가진 지방세력과 반대파들의 위협을 대외전쟁으로 돌리려고 하였다.
일본은 ‘정명향도’, 즉 ‘명나라를 치려고 하니 조선이 앞장서라’라는 명분으로 조선에 선전포고하였다. 1592년 4월 13일, 군함 700여 척으로 현재 부산을 공격해 왔다. 이때 일본은 조선이 가지지 못한 신무기인 ‘조총’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활과 창으로 싸움을 해야 하는 조선보다 강력한 무기였다.
당시 왕인 선조는 한양이 함락될 위기에 이르자 의주로 피난을 갔다. 대비가 없었던 조선은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다. 위기의 시기, 그러나 나라를 사랑하는 우국충정은 더 빛이 난다. 상당수의 선비가 의병장으로 나서서 일본군을 공격하였고, 개인 돈을 털어서 병사들을 먹였다. 비록 힘은 모자랐지만, 이들은 지형의 이점을 살려 게릴라전으로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등 허를 찌르기도 했다.
전쟁은 길어지고 먹을 게 없는 백성들의 허기는 날로 깊어졌다. “기근이 극도에 이르러 심지어 사람의 고기를 먹으면서도 전혀 괴이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렇게 전쟁의 폐해는 깊어지고 전 국토는 황폐해 갔으며, 비극의 상황은 2년간이나 이어졌다. 명나라의 참전 등으로 전쟁은 조선과 명의 승리로 휴전이 성립되었으나 일본군은 철수하지 않고 부산에 정박하고 있었다. 전쟁은 완전한 종전을 이루지 못하고 중단된 상태가 되고 말았다.
힘이 없고 준비를 하지 않는 사람은 이기지 못한다. 평화 시기에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나라는 위태롭게 되고 망하기도 한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전쟁의 아픔을 뼛속까지 겪은 세대들은 그 폐해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전쟁을 더 두려워한다. 그러기에 소중하게 얻은 평화를 꼭 지키려고 한다. 왕이 백성을 버리고 도망을 간 임진왜란의 역사는 치욕스러운 역사이며, 강한 힘만이 나라를 유지해 준다는 진실을 다시 한번 일깨우는 좋은 사례가 아닐 수 없다.
![]() | 서정문 칼럼니스트 ㅣ 시인, 수필가 / 정치학 박사 |
연성대 겸임교수, 전 성결대 외래강사 육군 대령 전역, 한미연합사, 국방부, 주 자유중국(대만) 대사관 연락관 근무, 연대장 시인, 수필가, <우리문학> 및 <한국수필> 등단 국제펜클럽 이사, 한국문인협회, 현대시인협회 회원 전쟁문학상, 화랑문화상, 국방부 주관 호국문예 시 당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