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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떠나시고

지도에도 없는 길 2018. 1. 18. 21:49



어머니가 떠나시고


2018.1.11.00시 27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거슬러 올라가면 2년하고도 몇 달 전, 2015년 5월에 허리를 다쳐 안동병원을 거쳐 서울의 제일정형외과로 가셔서 첫 치료를 하셨다. 그리고 입원을 하고 시술을 하고 난 다음, 그렇게 엉금엉금 길 정도였던 허리가 말끔하게 낫자 어머니는 다시 집 앞 밭으로 나가셨다. 그렇게 일을 하다가 허리를 다쳤는데도 다시 일터로 나가지 않으면 안되었던가. 그렇게 일을 하지 말고 무리하지 말고 쉬라고 했는데도.

평생을 들에서 일만 하면서 살아왔으니 일을 하지 말고 쉬라는 것은 어쩌면 무리한 요구였는지 모른다. 그렇게 일을 하다가 다시 허리가 무너졌다. 다시 시술을 했지만 불과 오래가지 못했다. 입원해 있는 동안 재활치료를 받으러 가다가 주저 앉아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강남에 좋다는 한의원도 여기 저기 다녔지만, 의사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골다공증이 심해서 뼈가 부러진게 아니고 무너져 내렸다는 표현이 맞다고 했다. 서울 아파트에서 10일 정도를 모셨다. 화장실에 갈 때는 안고가고, 식사도 누워서 했다. 그리고는 의정부의 요양병원으로 모셨다. 서울에서도 멀지 않아서 였다. 서울 집 근처에는 도저히 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수도권 안양에도 알아보았고, 직접 여러 곳을 보았지만, 열악한 환경 등으로 모시기가 힘들다고 여겨졌다. 의정부 요양병원에서 한동안 계셨으나 거기서 적응을 쉬이 할 수 없었다. 다시 동두천의 요양병원으로 모셨다. 원장님께 특별히 부탁해서 자리도 햇살이 잘 드는 창가로 잡았다. 그러나 매일 일만 하시던 분이라 누워만 지낸다는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적응을 할 수 없었다. 밤에는 잠을 자지 않는다고 하셨다. 자리를 옮겼다. 5층에서 2층으로. 이 방은 조금 편한 것처럼 느껴졌으나 햇살이 들지 않는 곳이었다.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몸이 많이 좋지 않으니 큰 병원으로 모시고 가라고 하였다. 서울대 병원으로 입원을 했다. 그래도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 한다는 곳이 아닌가. 응급실로 앰블런스를 타고 갔다. 거기서 허리를 검사하는데 청천벽력같은 소식. 폐결핵이란다. 허리를 고치러 왔는데 또 다른 병이라니. 아마 병원에 누워 있는동안 감염이 된 것 같다고 한다. 응급실에 이틀을 있는 동안 MRI 사진을 찍는데 몇 번을 취소하고 다시 찍었다. 사진을 찍는동안 가만히 있어야 하는데 어머니는 무엇이 불안한지 잠시도 가만 있지 않았다. 마취도 잘 듣지 않아 순서를 기다려 촬영실에 들어갔다가 나오기를 반복했다. 옆에 시중을 드는 가족들도 뜬눈으로 연일 밤을 새우고....의사들이 의논을 한 결과 허리수술이 결정되었다.  어머니는 허리 감압수술을 받고, 통증이 조금 감소되는 듯 했다. 결국 어머니는 독실에 격리되어 개인 간병인을 사용하면서 입원을 했다. 

두달이 지나고나서 퇴원이 결정되고 안동으로 모시기로 했다. 혹시 이대로 일어나지 못하시면 고향도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아 고향으로 모시기로 했다. 옆에 계신 분들도 모두 고향 사람이니 한결 낫겠지 생각해서. 무릉에 있는 한방병원으로 모셨다. 병실에서 어머니는 여전히 적응을 못했다. 밤이면 잠을 안자고 무슨 소리를 하고, 침대에서 내려오려고 발버둥을 쳤다. 한번은 가보니 어머니를 침대에 묶어 두었다. 배 부분을 조여 묶어서 버틸수록 온 몸에 땀이 나서 온 몸이 땀 범벅이었다. 병원에 항의를 하였다. 그러나 어머니가 침대에서 떨어지면 골절을 입기 때문에 하는 수 없단다. 묶을 수 밖에. 옆의 다른 환자들의 반발이 심했다. 밤에 잠을 좀 자자고.

다시 시내의 아주안제요양병원으로 옮겼다. 신시장에서 가깝고, 정기 형수가 소개를 했다. 친척이 원장이라고 해서 마음이 좀 편했다. 아무래도 좀 잘 해 주지 않을까 안심도 되었다. 병원은 교통도 편리한 곳에 있어서 좋았다. 특히 바로 옆에는 어머니가 늘 다니던 박무영내과 원장님 어머니가 계셨다. 그 분은 매일 점심 때면 병원에 와서 어머니 식사를 돕고, 운동을 도왔다. 참 지극정성이었다. 그 분이 자주 가서 어머니가 거기 계시는게 여간 다행스럽지 않았다. 우리는 서울에 살기 때문에 한번 어머니 보고, 훌쩍 떠나지만, 늘 그 분이 가시니 믿음직 스러웠다. 특히 어머니가 다니던 병원 원장님이시니.

하루는 어머니가 "일어나 걸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여 일어나 부축했더니, "안되는구나' 하시면서 주저 앉으셨다. 그 때까지도 어머니는 다시 걸을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었나 싶다. 아령 한 쌍을 사 드렸다. 누워있지만 팔 운동이라도 하시라고. 나중에 휠체어를 혼자 끌고 다니시려면 팔 힘도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아주안제병원에서 어느 날, 어머니를 휠체어에 앉히고 휴게실로 가서 한참을 앉아 이야기하던 기억, 뒤에서 휠체어를 밀면서 휴게실을 돌아다니던 일. 참 새롭다.

아주안제병원에서 나오게 된 것은 역시 응급 상황 때문이었다. 어느 날 밤, 토요일 이었다. 휴일이라 병원에 의사 선생님이 안계시고 간호사만 있었나 보다. 오전 10시 경에 간호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머니가 열이 좀 있어요" 한다. 다시 오후에 전화가 왔다 "열이 떨어지지 않아요". 결국 그 날 밤, 갑자기 안동병원 응급실로 실려갔다. 옆의 박무영내과 원장님이 어머니 식사를 도우러 왔다가 어머니 상태를 보고는 "빨리 응급실로 옮겨야 한다"고 하셔서 바로 동네의 친구 갑이에게 연락하여, 앰블런스로 안동병원응급실로 이송시켰다. 병원에서 겨우 의식을 회복하셨다. 늦었다면 돌아가셨을 거라 하셨다. 박무영 내과 원장님이 공헌이 컸다. 아울러 동네 친구 갑이가 적절한 시기에 앰블런스로 이송해 준 덕분이었다.

병명은 알고보니 콩팥의 결석 때문이었다. 결석이 상당히 많이 쌓여있었다. 병원에 오래 계시다보니 자꾸 새로운 병들이 발병하는것 같았다. 누워만 있으니 없던 병도 자꾸 생기는 모양이다. 수술을 하려고 보니, 요로관이 막혀 있어서 수술도 곤란하다고 한다. 혹시 수술을 하다가 돌아가실 수 도 있다고 한다. 수술대신 관을 삽입하기로 했다. 요로와 콩팥, 관 두 줄이 생겼다.

그리고 다시 1인실로 옮겼다. 폐결핵 약을 6개월간 드셔야 하는데 아직 그 기간이 남았다. 어머니는 아직도 병원에 적응이 안되는지 매일 잠을 잘 못자고, 침대에서 발버둥을 친다고 한다.

퇴원을 하고 나서 다시 아주안제병원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병원에서 받아주지 않았다. 관을 교체하고 혹시 빠졌을 때, 처치가 어려워 어머니를 받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어디로 가야 할까? 이곳 저곳을 수소문하다가 결국 의정부요양병원으로 다시 가게 되었다. 처음 어머니가 있었던 곳. 사촌 처형이 그 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는 덕에 그곳에서 받아주기로 했다. 처형에게 여러모로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다. 결국 어머니는 그 병원에서 계시다가 돌아가셨으니 그래도 그 처형이 가장 가까이에서 돌보아 준 분이다. "언니, 우리 어머니 부탁해. 너무 가엽고 불쌍해. 누워만 계셔도 오랫동안 볼 수 만 있어도 좋겠어" 집사람이 어머니를 그 병원에 맡기고 처형한테 한 말이라고 한다. 그렇다. 시골 고향에 가면 만나는 동네 어른들이 지나가는 말로 한 마디씩 하신다."아이고, 이젠 고마 가야할낀데...그래 살면 뭐하노..."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그렇게 답을 해본다. "아니, 살아만 계시는게 얼마나 다행인데요. 얼굴도 보고 이야기도 나눌 수 있잖아요".

의정부요양병원에 오시니 이제는 어느 정도 기운이 약해졌는지, 병원에 적응이 된 것인지. 어머니는 비교적 잘 적응하셨다. 죽을 드시지만, 병실에서 가장 잘 드셨다. 꼭 두 그릇을 비우셨다. 삶에 대한 의욕도 강하신 편이라고 하셨다.


의정부요양병원에서 갑자기 연락이 왔다. 아니 집사람 한테서 였던가. "어머니 몸 상태가 좋지 않으니 올라와야 겠다"고. 부랴부랴 첫 비행기를 끊어서 서울로 왔다. 어머니는 집 앞 성모병원 응급실에 있었다. 링거줄을 하고, 산소를 코에 꽂고. 그러나 말을 알아듣기도 하고 분명하지는 않지만 말도 하셨다. 어제까지 식사를 잘 하셨는데 갑자기 상태가 악화되었단다. 폐렴이란다. 그리고 독감도. 이런 저런 검사도 하였지만, 이 병원은 24시간이 응급실 허용이란다. 병실이 없었다. 그래서 전에 계셨던 순천향병원에 병실이 있는지 알아보았다. 다행히 병실은 있었다. 그때, 의정부요양병원에서도 항생제 투여가 가능하고 치료방법도 동일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고민을 하다가 그래도 있던 곳이 편할 것 같아 의정부로 가기로 했다. 앰블런스에 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탔다. 밤 늦은 시간, 어머니를 의정부 요양병원에 모셔두었다. 중환자실에서 관찰을 하겠다고 하였다. 어머니를 모셔두고고 집으로 왔다. 다음 날 아침, 다시 전화가 병원에서 왔다. "콩팥의 관이 빠졌다"고. 의사 소견이 "관을 다시 교체하는게 좋겠다"고 하셨다. 의정부성모병원으로 앰블런스로 모셨다. 산소가 필요해서 가면서도 산소를 떼지 못했다. 어머니 상태가 어제 강남성모병원에 있을 때보다 더 나빠지는 것 같았다.

의정부성모병원 응급실은 북새통이었다. 어머니를 실어 온 앰블런스 기사는 가야한다고 하는데 침대는 나지 않았다. 기다리다가 다른 앰블런스 기사가 앰블런스 침대를 교체하고 그는 떠났다. 응급실 복도에서 침대가 나기를 기다렸다. 오래, 정말 오래 기다려서 침대가 나고, 어머니는 실려서 관을 교체하는 시술실로 갔다. 관을 교체하고 나오는데 어머니의 모습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 의사도 '이것이 어머니 마지막 관 교체가 될 것'이라고 했다. 흡사 아버지가 마지막 돌아가시기 전 날 모습같았다. 삶의 마지막 모습이 너무나 힘겨운 것 같아 가슴이 먹먹해졌다. 어제 강남성모병원 응급실에서도 "제주도 가고 싶다" 고 하셨는데....이제는 말도 못하시고....


집사람에게서 연락이 왔다. 어머니가 오래 못 가실 것 같다고. 여동생과 아래 처제가 함께 병원에 문안을 간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자정이 지나고 전화가 왔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2018년 1월 11일. 00시 27분이었다. 


 잠시 눈을 붙이려고 누워보았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일어나서 가방을 주섬주섬 쌓다. 그리고는 다시 책상에 앉아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해 보았다. 그리고 장례식 날 그동안 숙제로 남겨두었던 증조부와 조모, 조부와 조모, 아버지, 큰어머니, 미리 떠난 동생의 묘들도 다시 정리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해마다 벌초 때는 어머니와 동행하였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어머니도 화장은 꺼리셨는데  벌초를 동행하시면서 그 고생을 이해하시곤 " 나 죽으면 화장을 해라"고 하셨다. 안동이란 동네가 본래 화장문화가 다른 지역보다 터부시하는 경향이 없지 않아서일까. 몇 년 전만 해도 대부분 매장을 하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화장은 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작년에 안동지역 화장은 전체 사망 인구의 75% 정도라고 한다. 많이 향상된 의식변화라 할 수 있다.

창밖에는 어제 부터 눈이 내리고 있다. 제주도에 내리는 눈이야 밤에는 쌓여도 아침이면 녹아버리는게 일상인데... 그렇게 생각하면서 물끄러미 대나무 밭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았다. 방안의 불빛에 내리는 눈은 함박눈. 걱정이 다소 되었다. 새벽에는 많이 쌓일 것도 같았다. 다시 눈을 잠시 붙이다가 훌쩍 눈을 뜨니 3시 반. 일어나서 옷 가지를 챙기고,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해야 할 일들을 적은 프린트 종이를 안주머니 챙겼다. 문을 나서니 아직도 눈이 조금씩 내리고 있고, 길에는 제법 상당한 눈이 쌓여 있었다.

어떻게 알고 왔는지 아니면 어느 손님이 타고 왔는지 호텔 앞에 택시 한 대가 나타났다. 걸어서 버스 타는 곳까지 가려는데 뒤에서 불빛이 나타나고 택시가 슬슬 따라왔다. 택시를 타고 신시가지로 갔다. 차들은 거의 다니지 않았다. 공항으로 가는 첫 버스를 물어보고 기다렸는데, 그래도 800번이 가장 먼저였다.

0610분에 출발하는 첫 버스를 탔다. 버스는 서너 번의 정차 끝에 손님들은 다수 태웠다. 그러다가 신시가지 오르막 길에서 미끄러지면서 올라가지 못하고 말았다. 뒤로 주춤주춤 내려가는데, 아슬아슬하게 길 옆에 세워 둔 차들을 비켜 갔다. 조마조마한 가운데 백 여 미터 정도 미끄러지다가 평지 부근에서 다시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마음은 다급한데 버스가 과연 공항까지 제 시간에 갈 수 있을까 싶었다. 대구행 비행기는 0825분인데.....

다행히 버스는 그 다음 길들이 평지이거나 약간의 오르막이어서 무사히 공항에 도착했다. 눈이 올 때 제주도에서는 유일하게 탈 수 있는 것이 대중교통인 버스 뿐. 그래도 시간 안에 공항에 도착하였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비행기표를 끊고 수속을 했다. 한 층 위로 올라가서 기다렸다.

그리고 시간이 되어 비행기에 탔다. 그때까지도 눈은 계속 내리고 있었다. 아주 많은 눈은 아니지만 간헐적으로 폭설이 내리는 공항. 걱정스러움이 앞섰지만, 무사히 이륙할 수 있겠지 하는 염원을 가지고 비행기 좌석에 앉았다. 비행기 트랩을 오를 때도 눈은계속 내리고.... 한 30분을 기다렸을까. 모든 승객에게 항공기에서 내리라고 하면서 버스가 다시 비행기 옆으로 도착했다. 하는 수 없이 버스를 타고 입국 장소로 하여 공항 안으로 들어왔다. 이미 공항에는 많은 사람들이 들어차 있었다. 아침 요기라도 좀 할까하여 편의점을 들어갔다가 음료수 하나를 사서 나오니, 수속 코너에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비행기에서 내렸으니 다음 비행기는 가장 먼저 탈 수 있겠지' 라고 생각했다. 항공사 직원에게 물어보려해도 묻는 줄이 너무 길었다. 겨우 항공사 직원에게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물어보려는데, 줄을 서 있던 사람이 '줄을 서서 기다려서 물어보라'고 한다. 엉거주춤 줄을 섰다.

한 시간이 지나도 줄은 좀처럼 줄어지지 않았다. 다시 다른 곳의 줄에 서 있는 사람에게 줄이 무슨 줄인지를 물어보았다. 이 줄은 내일 비행기표를 사려는 줄이라고 했다. 또 다른 한 줄은 오늘 가려는 사람들이 서서 기다리는 줄이었다.

어느 곳에 서야할 지를 망설이다가 내일 줄이라도 서야겠다고 하면서 뒷 사람에게 자리를 부탁했다. 잠시 다른 곳에 가서 무엇을 물어보면 다시 맨 뒤로 가야하는 어려움을 해소하고자 뒷사람에게 잠시 카운터에 가서 물어보고 다시 오겠다고 했다. 그때 한 항공사의 코너는 다른 곳보다 다소 여유가 있는 듯 했다. 다짜고짜 그 곳으로 가서 직원에게 '오늘 이나 내일 표 하나'를 부탁했다. 남은 표가 없다고 했다. '혹시라도 취소하는 표가 나오면 주라'고 부탁을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육지로 빨리 가서 장례를 치러야 한다고 사정이야기도 했다. 그래도 표는 없으니 방법이 없었다.

지인에게 여행사에 이야기해서 표를 한 장 구할 수 없을까 물었으나 마찬가지 였다. 비행기 한 대가 결항하고 나서 다음 비행기는 이미 기존 예약한 손님이 있으니 취소하는 손님이나 빈 좌석이 있어야 자리가 나기 때문이었다. 공항 구내에 줄은 굽이굽이 서 있지만 줄은 전혀 줄지 않는 이유가 당연했다. 인터넷으로 예약을 하려해도 이미 막아 놓았는지 접속이 되지 않았다. 다시 배편을 알아보았다. 제주에서 목포로 가는 배편이 1340에 있다고 했다. 택시를 타고 부두로 갔다. 7부두까지 가보니 다시 2부두로 옮겨가야 한다고 했다. 종이 한 장이 창에 붙어 있었다. 2부도로 다시 택시를 타고 갔다. 마침 7부두로 오는 손님들이 있었는데, 물어보니 목포로 간다고 했다. '목포로 가는 배편은 부두가 2부두로 바뀌었다'고 하고 함께 그 택시로 2부두로 갔다. 다시 긴 줄을 서서 표를 끊었다. 그리고 한 숨을 돌리고 버스를 타고 배가 있는 곳으로 갔다. 천천히 배를 타고 객실에 올랐다. 가방을 놓고 객실 벽에 등을 붙이는 찰라 전화가 울렸다. 갑판에서 하늘을 보니 푸른 하늘의 잠시 보이기도 했다. 오후부터 항공기가 다시 뜨기 시작했다고 한다.

출항 30분 전, '서울 김포로 가는 표 한 장을 구했다'고 한다. 구세주가 다름 없었다. 목포로 가서 다시 광주로 광주에서 대전, 그리고 다시 대구로, 대구에서 안동으로 가려던 계획이었는데... 일단 다시 공항으로 택시를 타고 갔다. 오후 3시 25분 비행기표를 한 장 손에 쥐었다. 결항이던 항공기가 간간히 뜨는 모양이다. 하늘은 여전히 흐리고 눈이 조금씩 뿌린다. 그래도 제설작업을 하면서 비행기는 간혹 뜨는 모양이다. 처음부터 수속을 하고 다시 한 층 위로 올라가서 항공기 대합실에서 기다렸다. 전광판에서는 다시 지연을 알리면서 1740분으로 고쳐졌다. 그리고 다시 1830분으로 수정이 되고. 드디어 항공기로 가는 버스를 탔다. 눈은 여전히 내리고 있었지만, 항공기가 이륙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비행기 트랩을 올랐다. 창가 자리. 얼마나 소중한 자리 였던가. 서울로 가는 자리. 바깥이 잘 보이는 곳이었다.

안내 방송이 나오고 비행기는 대기 순서를 기다렸다. 그런데도 눈은 계속 내리고 밤이 되자 바람은 더 세차지면서 눈도 순간 폭풍우로 변하기도 했다. 순식간에 눈이 쏟아지고. 아니운서가 나왔다. 활주로가 폐쇄되어 다시 제설작업을 해야한다면서 1시간이 연기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제설작업이 끝날 때 쯤 비행기 한 두 대가 내리고, 아 다시 폭설. 다시 안내방송, 다시 활주로가 폐쇄되어 다시 한 시간 반 이상이 걸린다고 했다. 그러기를 몇 번, 활주로에는 제설차가 끊임없이 왕복하면서 눈을 치우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비행기 자체의 제설 작업을 하고 이륙한다고 헀다. 이제는 이륙하는가 싶었다. 항공기는 천천히 움직여 어느 장소까지 가서는 섰다. 액체를 뿌리는 차들이 와서 날개를 씻어내렸다. 그것도 두 번, 그 사이에 다시 눈이 내리고, 활주로가 폐쇄되고..... 그렇게 해서 결국 밤 12시를 넘기고 말았다. 새 날이 되었건만 상황은 별로 나아진게 없고 눈은 간헐적으로 계속 내렸다. 잠시 눈이 소강 상태일 때 활주로의 눈을 치우고, 그 때 이륙해야 하는데..... 두 대가 활주로에 내렸다. 그리고 우리 비행기가 천천히 활주로 방향으로 이동했다. 그 때가 1시를 넘긴 시각. 드디어 비행기는 미끄러운 활주로를 날아올랐다. 이때까지 비행기에서 내린 승객도 여럿 있었는데, 그래도 꼭 가야하는 사람들. 비행기 안에서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김포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고 하니, 이륙만 하면 되는데....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환호성과 함께 비행기는 활주로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혹시 이륙하면서 눈 때문에 미끄러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비행기는 잘 날아올랐다.

이륙후에도 심하게 흔들렸다. 눈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날아오르니 아무리 큰 비행기라도 흔들리지 않을 수 없겠지. 그렇게 비행기는 이륙했다. 기체가 흔들려도 서울로 갈 수 있다는 생각. 이제는 육지에 갈 수 있다는 생각. 돌아가신 어머니 장례를 치를 수 있다는 생각 뿐이었다. 서울에가면 어떻게든 안동까지 갈 수 있겠지. 아 섬, 역시 섬은 섬이었다. 바다를 건너기가 그렇게 힘이 들었다. 육지에서야 어떻게든, 밤을 새우든, 아무리 멀어도 달려갈 수 있으니까.

안동에 도착하니 새벽 5시였다. 어둔 밤 길을 달려 겨우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감사한 사람들. 고마운 분들, 잠시 눈을 멈추게 해 준 하늘에 감사했다. 그 잠시 동안에 비행기는 이륙할 수 있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