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스크랩] 제3회 은상 - 탈을 내리다 / 이혜경

지도에도 없는 길 2013. 9. 18. 09:45

탈을 내리다

 

십 년 만의 외출이다. 결혼을 하고 안살림을 맡다 보니 가족의 테두리를 벗어날 기회가 흔치 않다. 혼자만의 여행을 꿈꾸는 것은 말 그대로 꿈에나 있을 법한 먼 이야기다. ‘문화 탐방’이라는 명분이 있어 어렵사리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주차장에서 하회 마을까지는 제법 거리가 멀었다. 마을 입구까지 태워다 주는 버스가 있었지만 봄의 정취를 느끼기 위해 걷기로 했다. 홀가분한 마음 때문이었는지 걸음을 옮길 때 마다 발끝에서 십육분음표가 찰랑거렸다. 여느 관광지와 별로 다르지 않은 인공적인 주차장 풍경과는 달리 마을로 이어지는 둑길에서는 자연 그대로의 소박함이 묻어났다. 봄비에 젖어 습자지처럼 달라붙는 꽃잎은 낯선 이방인에게 악수라도 청하는 듯했다. 회색 구름과 수수한 무채색의 전통 가옥이 조화를 이룬 하회 마을 풍경은 한 폭의 수묵화 그 자체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빗줄기가 점점 굵어졌다. 비 때문에 별신굿 탈놀이는 야외 공연장이 아닌 실내 공연으로 장소가 바뀌었다. 하회 별신굿 탈놀음은 오백 년 전통을 오늘날까지 이어주는 의미 있는 무형 문화재이다. 다른 곳에서 만날 수 없는 귀한 공연을 보기 위해 궂은 날씨에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보려는 사람은 많고 공간은 턱없이 좁아서 낯선 사람들과 어깨를 겹쳐가며 쭈그려 앉았다. 불편하지만 그렇게라도 실내에 앉은 것은 행운이었다. 미처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은 창 밖에 다닥다닥 붙어 서서 목을 길게 뽑고 까치발을 해야 했다.

경쾌한 날라리 연주를 시작으로 별신굿 마당이 펼쳐진다. 처마 자락을 타고 미끄러지는 투둑 빗방울 소리도 박자를 보탠다. 가슴 한 가운데를 정통으로 두드리는 꽹과리 소리에 심장 박동이 덩달아 빨라졌다. 우리 전통 악기의 구성진 가락은 국경도 훌쩍 뛰어넘었다. 앞 쪽에 있던 외국인 할머니가 흥에 겨워 일어나더니 팔을 저으며 춤을 추었다. 그 모습에 몇 사람이 더 가세해 한바탕 흥겨운 춤판이 벌어졌다.

탈놀이는 여섯 마당으로 나누어 진행했다. 한 마당이 끝날 때 마다 시원한 풍물 연주가 흥을 돋우고 다음 이야기에 기대감을 높여 주었다. 탈춤 마당에서는 신분의 서열도 남녀의 차별도 존재하지 않았다. 남루한 차림새지만 거침없는 입담으로 양반을 조롱하는 초랭이의 모습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가장 근사한 탈을 쓰고 비단옷을 입었지만 속마음을 숨긴 채 체면치레에 급급한 양반탈의 모습과는 대조적이었다. 남정네들 앞에서도 당당하게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부네의 모습도 기존에 알고 있던 전통 여인상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할미탈이었다. 허리춤을 다 드러내고 익살스런 춤을 추며 등장한 할미탈의 모습에 아이처럼 큰 소리로 깔깔대며 웃었다. 그러나 우스꽝스런 말투와는 다르게 그녀가 살아온 내력은 녹록치가 않았다. 여자로서의 인생은 없이 오로지 가족들을 위해 한 몸 희생하고 참아야 했던 서러운 세월을 듣고 있자니 내 마음도 함께 젖어 들었다. 할미탈에 비하면 내가 살아온 인생은 턱없이 짧고 굴곡도 깊지 않지만 주부라는 공통점이 있어 그런지 정서적인 공감대가 느껴졌다.

문득 나는 지금 어떤 탈을 쓰고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본다. 그동안 나는 다른 사람에게 늘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 욕심 때문에 남 눈을 의식해 행동할 때가 많았다. 좋은 아내, 현명한 엄마, 싹싹한 며느리가 되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상황에 따라 여러 개의 얼굴이 필요했다.

성격이 다른 두 사람이 부부로 지내다 보면 사소한 일로 티격태격 할 때가 많다. 내 마음같지 않은 남편의 무심함에 속상할 때도 있고 서로에 대한 오해 때문에 억울한 적도 있었다. 신혼 때는 작은 일로도 끝까지 내 목소리를 세우며 따지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마음의 흉터만 생길 뿐이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불만이 생길 때도 되도록 내색하지 않고 내 감정을 누르려 애썼다. 아내인 내가 참고 넘기는 것이 가정의 평화를 위한 일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렇게라도 ‘착한 아내’소리를 듣고 싶었다.

아이들에게는 ‘좋은 부모’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자녀 교육에 관한 책을 부지런히 찾아 읽었다. 그러면서도 ‘모범생의 엄마’소리는 포기하기가 힘들었다. 밖에서 다른 사람들과 아이들 교육에 관해 이야기 할 때는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키우자’고 말하면서 막상 집에 오면 성적 때문에 아이를 다그칠 때가 많았다.

시부모님들께는 참한 며느리 소리가 듣고 싶었다. 애교와는 거리가 먼 무뚝뚝한 성격이지만 시댁에 전화를 드릴 때면 목소리가 저절로 한 톤 올라가곤 했다. 시댁 식구들과 가족 모임이 있을 때면 일부러 더 밝게 웃고 말도 많이 하려고 노력했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니 내 마음을 따르기 보다는 타인들의 시선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이 짜 놓은 틀 속에 나 자신을 억지로 짜 맞추기에 급급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가진 탈의 개수는 점점 늘어나고 두께도 두터워졌다. 이제는 탈을 벗은 맨 얼굴이 스스로도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겉치레에 눈이 멀어 탈을 치장하고 다듬는 것에만 신경을 썼다. 점점 더 요란하고 두꺼워지는 탈의 외양과는 달리 가슴 한복판은 자꾸 깎여나가는 느낌을 받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더 탈 뒤에 숨으려고만 했다.

별신굿 마당이 모두 끝났다. 등장인물이 모두 한 무대에서 흥에 겨운 몸짓으로 춤을 춘다. 관객들의 박수갈채가 쏟아지고 관객의 호응에 연기자들이 탈을 벗고 마지막 무대 인사를 한다. 한 명씩 자기 소개와 함께 탈을 벗었다. 탈을 쓰고 있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온통 땀범벅이 됐지만 열정으로 달아오른 그네들의 민낯은 신선하게 다가온다.

이제 내 차례다.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잠시 탈을 내려놓고 싶다. 접혀 있던 어깨를 반듯하게 펴고 손바닥이 뜨거울 정도로 박수를 치며 나는 별신굿의 마지막 장면 속으로 들어간다.

출처 : 고울문학회
글쓴이 : 인도공주(표수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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