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회 전쟁문학세미나 발표자료
한국전쟁과 동두천
발표; 서 정 문(시인)
■ 약력
육사 전사학과 졸업
경기대 정치학박사
■ 주요 경력
1991년 시로 등단
호국문예 시부문 당선
시집: 화랑대, 푸른날개
1. 서론
2. 한국전쟁 초기의 동두천
3. 한국전쟁 중의 동두천
4. 한국전쟁 이후의 동두천
5. 결론
1. 서론
한국전쟁 발발 당시 38선은 바로 동두천에서 북으로 수 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전곡의 한탄강을 연하여 38선이 그어져 있어서 동두천은 초기 전투에서 바로 적의 영향권안에 들게 되었다. 따라서 초기 전투에서 바로 북한군과 조우하여 접전을 벌인것이다. 전쟁이 발발하던 당시 동두천일대의 한국군 방어부대는 제7사단 1연대 였다. 1연대의 본부는 의정부 서쪽 직동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38선에는 그 가운데 1개 대대만이 배치되어 있었고, 나머지 2개 대대는 예비로 연대본부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하루 전 날, 연대는 참모회의를 열어 장병들의 외출문제를 논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대대수의 참모들은 장병들의 외출을 적극 건의하였다.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비상경계령이 해제된 상황이라 전방에 약간 이상 징후가 있더라도 장병의 사기를 고려하여 외출을 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제1대대와 제3대대의 일부 중화기만 비상대기시키고 나머지 인원은 외출을 보냈다. 연대장 함준호 대령은 부임한지 한 달 정도되어 연대의 상황을 완전하게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으며, 상부에서 지시가 된 상황이라 부대운용을 그렇게 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는 비단 동두천을 방어하던 1연대만의 상황은 아니었다. 전군에 비상경계령이 비로소 해제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을 통틀어 동두천이 가지는 의미는 적의 주 공격로가 이 지역이라는 것이며, 적의 강력한 공격에도 아군이 일격을 가하여 적을 당황하게 만든 전투지역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군은 의정부에서 동두천으로 이어지는 방어지역을 온전하게 방어하지 못하고 수도 서울의 북동쪽을 북한에게 내어주고 말았다. 이후 전쟁이 진행되면서는 격전지, 혹은 38선을 중심으로한 공방전에서 중요한 후방병참 기지와 본부지역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또한 한국전에 참전한 외국군 부대의 중요 거점지역이기도 했다. 수도 서울의 동북방에서 동두천은 어느 지역보다 중요한 지역이었으므로 미군과 유엔군의 주 전력이 방어하고 공격하였으며, 전투를 치열하게 수행한 지역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역할속에서 동두천은 전방 어느 지역에도 없는 한국전 자유수호평화박물관을 보유하고 있으며, 지역뿐아니라 다른 지역의 관람객까지 아우르는 활동을 왕성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2011년 5월27일부터 한 달간 자유수호평화박물관에서 ‘한국전쟁과 동두천‘이라는 제하에 한국전쟁 당시 동두천 칠봉산에서 발굴한 전사자 유해 발굴품과 당시 하봉암에 주둔했던 노르웨이 야전병원의 의학도구 등 유물 50여 점을 전시하는 의미있는 활동도 전개하였다.
2. 한국전쟁 초기의 동두천
동두천은 지리적으로 38도선 부근에 위치하여 있었기 때문에 전쟁 초기 북한군에 의해 신속하게 점령당하였다. 이 지역에서의 초기전투는 아군 제 7사단 제 1연대가 북한군의 주공집단인 제 4보병사단과 제 105전차여단 1개 전차대대와의 공방전이었다. 적의 사단장은 이권무 소장이었으며, 연천에서 발진하여 경원가도를 따라 동두천으로 침공하였다. 3번도로인 이 축선은 서울로 이르는 가장 가까운 길이었다. 초기 초성리 지역전투에는 적 주공인 16연대와 사단포병 2개대대, 공병대대(-1), 2개 전차중대가 협동으로 초성리고개로 공격해왔다. 6월 25일은 일요일이어서 전군에 주말 외출이 허용되었다. 연대 역시 제 2대대와 1개 비상대기중대만 대기시키고 1/2병력은 외출 혹은 외박을 실시하고 있었다. 제 1연대장인 함준호 대령도 부임 1개월 정도여서 부대장악이 잘 이루어지지 못했고, 제 3대대장 한태원 중령도 보병학교 고등군사반 교육중이었으며, 제 3대대장 김황목 소령도 6월 30일부로 참모학교 입교 명령을 받고 있어서 연대는 2대대 단독으로 초성리-적성 간의 경계진지를 경비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적에 대해 전력의 허점이 생겨 있었던 것이다. 적에 대한 대비는 연대지역을 2개 중대가 방어를 하고 있는 상태였다.
적의 공격을 최초로 보고 받은 것은 제 7중대로부터 였다. 당일 04시 10분에 대대본부가 적의 공격을 처음 예하중대로부터 보고를 받은 것이다. 적은 최초 포병 공격준비사격을 시작으로 대대규모의 주력이 한탄강을 건너 전초 제 1소대를 집중 공격해 왔으며, 소대원 32명이 혈전을 벌였다. 전차는 04시 50분에 그 선두가 전방지역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이 보고를 받은 제 2대대장 이의명 소령은 대대본부를 동두천에 두고 있었다. 그는 5중대 1개소대와 중화기중대에서 박격포 1개반, 기관총 1개반을 편성하여 남진하는 적 전차에 대해 사격을 가했지만 전차는 유유히 남진하여 초성리역 부근에서 사방으로 기관총을 사격하였다. 이에 제 7중대와 중화기소대는 지리멸렬하여 전초 경계진지와는 연락도 취하지 못한 채 연대의 주진지인 소요산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당시 박격포 소대장인 장서호 중위의 말을 따르면, “하봉암리에서 전초소대의 병사를 만나 상황을 물어보니 거의 다 전사하고 몇 명만 협로를 뚫어 후퇴를 하였다”고 했다. 국방부의 한국전쟁사에서는 제 7중대 병력의 2/3는 옥쇄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교전 3시간만에 전방지역 경계진지를 잃고 주력이 분산된 제 2대대는 나머지 병력을 추슬러 소요산-마차산의 주진지 전방에서 지연전을 펼치기로 하고 제 5중대와 중화기중대의 나머지 병력을 모아 동막골-하봉암선에 급편진지를 편성하여 분산된 병력을 수습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6월 25일과 26일 전쟁 상황을 추가로 살펴보면, 나름대로 잘 방어를 한 것도 있다. 당시 적에 대항하여 아군 1연대는 마차산 정상을 점령하고 있었는데, 초기전투에 아군은 전투에 미숙함을 보였으나 25일 22시까지 비교적 적을 잘 막아냈다. 또한 제 1대대 제 4중대 박찬긍 중위는 연대 당직사령이었다. 24일 15시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지금 전곡 부근에 적이 집결한다는 첩보가 있으니 그 병력이 정규군인지 보안대원인지 확인하여 보고하라” 고 했다. 이어서 “전차가 나타났는데 몇 대 인지 확인하라” 는 지시가 하달되었다. 25일 04시 20분, 연대장은 비상을 발령하였다. 그리고 출동태세를 갖추면서 대기중인 제 3중대를 동두천으로 급히 파견하였다. 06시 30분경, 지원 3중대는 2대대본부인 동두천에 도착했으나 지휘부가 이미 전방으로 올라가 버려 연락을 취할 수 없자 초성리로 바로 직행하였다.
초성리 2km 남방 176고지를 지나자 포탄이 심하게 낙하되고, 차량기동이 불가하였다. 하차하여 전방을 살피는데 초성리 남쪽에 전차 2대가 앞장서고 그 뒤에 대대 규모의 병력이 2열종대로 대로를 따라 유유히 내려오고 있었다. 이때가 07시 10분경이었다. 제3중대는 방도가 없자 176고지 북쪽에 전개하여 일전을 벌였는데 적 선두를 집중사격하여 적의 대오를 흐트려뜨리며 상당한 손실을 입혔으나 적의 화력에 밀려 화기소대장 안태섭 중위가 전사하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여 더 이상 지탱할 수가 없었다. 이때, “소요산 입구로 전진하여 소요동 입구에 병력을 배치하라”고 지시를 받고 소요산 입구로 이동하여 능선에 병력을 전개했다. 그리고 제3중대 꽁무니를 따라오던 전차와 대대규모의 적은 광풍처럼 제2대대 진지로 밀려들어 한바탕 전투가 벌어졌다. 제 2대대는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혼신으로 적을 막아 11시까지 진지를 고수했다. 이때는 어떻게하면 시간을 벌고, 적의 전진을 지연시키는가가 중요한 일이었다. 이때 제 1대대 잔류병력 300여 명이 동두천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제 3대대장 김황목 소령이 지휘하는 비상소집된 병력 200여 명이 봉암리로 출발하였다. 제 1대대가 동두천에 도착시, 적의 포화는 금융조합, 우체국, 역사 등 공공건물이 파괴되었다. 읍내는 피난민 행력이 길을 메웠다.
김한주 중위가 지휘하는 제 2포대는 0930분에 동두천에 도착하여 주진지를 동막골과 하봉암 남쪽 5km 지점에 있는 보산리에 10미리 5문을 방열하고 김중위가 직접 관측수가 되어 목표물을 유도하면서 포탄 250여 발을 적의 전방에 퍼부었다. 예기치 못한 집중 포화에 선두의 적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적 시체가 공중으로 치솟는 것이 보였다. 이를 본 뒤편의 적은 혼비백산하여 도망하기에 바빴다. 적은 최소한 대대 규모의 병력을 잃었을 것으로 목격자들이 증언했다. 이러한 전투결과가 육군본부와 국방부에 보고되었고, 적의 최정예인 16연대의 공격을 물리쳤다는 것은 전파를 타고 온 국민에게 알려져 반격설로 비약하기도 했다.
동두천은 25일 22시경에 함락되고, 제 1연대는 덕정지역으로 철수하였다. 의정부축선이 위험한 것을 인지한 육군본부는 동두천 축선에 제 18연대(-1)를 증원하였다. 그리고 동두천을 재탈환할 것을 명하여 제 1연대가 일시적으로 동두천을 재탈환 하였다.그러나 이 때 포천축선에서 공격하던 적 제 3사단에 의해 동두천 후방인 의정부가 조기에 함락되었다. 이에 의정부 북쪽에 배치된 제 1연대와 제 18연대는 퇴로가 차단되어 불가피하에 후퇴하게 되었다.
3. 한국전쟁 중의 동두천
반격작전을 수행하면서 압록강 부근까지 진격한 아군에 대해 중공군은 예기치 않은 변수가 되었다. 다수의 중공군에 밀려 다시 후퇴할 때에도 38선 부근에서의 치열한 전투로 인해 동두천은 격전지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전투부대의 지휘소가 위치하고 많은 군 지원시설이 위치하였던 곳이다.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동두천 지역에서 많은 전투를 한 부대는 미군의 제 1군단이었다. 전투는 주로 중공군과 이루어졌다. 중기전투, 즉 1951년 중반에 많은 전투가 이루어진 곳이 동두천 부근이었다. 영국군 제29여단은 1951년 4월 22일, 중공군과 설마리에서 격전을 치른다. 이때는 영연방 제 1사단이 창설되기 이전이었다. 그 이후 미 1군단 가운데 한 부대인 영국의 제 1사단이 창설되었다. 그곳이 바로 덕정이다. 영국 제 1사단은 1951년 7월 28일, 제 8군사령관과 주일 영연방군 총사령관이 참석한 가운데 창설되었다. 사단은 영연방, 제 28여단, 영 제 29여단, 캐나다 제 25여단을 주축으로 구성되었다. 영연방 제 1사단은 주로 임진강을 중심으로 좌측은 적성일대에 29여단을, 우전방 도감포 일대에 영 28여단을 배치하였다. 당시 중공군은 제64군 제 192사단이 배치되었으며, 설마리 지역에 투입되어 전투에 참전하였다. 이후 영 연방 제 1사단은 여러지역 전투임무를 수행하다가 1953년 1월 31일, 군단의 예비로서 동두천 전방지역에서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리고 뉴질랜드의 포병대대가 1951년 10월 경 아군을 지원하면서 동두천 일대의 진지를 구축하면서 포병 사격을 지원하였다.
캐나다의 여단도 1951년 10월 경의 전투에서 동두천과 그 동부지역 일대에서 임무수행을 하였다. 중공군과 일전 일퇴를 하면서 동두천 지역에서 활동을 한 부대이다.
1953년에는 프랑스 대대가 동두천 지역을 거쳐 운천, 연천, 철원 지역에서 전투를 수행하였다.
필리핀 대대는 1951년 3월 30일 적성에 진출하여 영연방 제 29연대에 배속되었다. 그 이후 4월 4일에는 동두천 남쪽 송내리로 이동하여 미 제3사단의 예비가 되었고, 4월 11일엔 임진강 동측인 진상리 일대에서 공격에 참전하였다. 그리고 연천 북측까지 진출하였다. 6월 27일에는 한탄강변에서 방어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때는 동 부대가 이 축선에서 동두천을 중심으로 활동을 하였다.
태국의 타이 대대도 1952년 철원일대에서 이동하여 1953년 3월 경의 전투에서 동두천 일대를 중심으로 전투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리스 대대는 1951년 동두천으로 이동하였다가 임무를 수행하면서 다시 연천, 철원으로 이동하였다.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대대 역시 1951년 의정부에서 동두천으로 이동하여 임무를 수행하였다.
동두천에서의 대표적인 ‘동두천 지역 전투’는 1950년 12월 31일부터 1951년 1월 3일까지의 전투이다. ‘동두천 지역 전투’라고 명명하고 있다. 동 전투는 동두천-의정부 북쪽 38선 일대에서 방어 임무를 수행하던 국군 6사단이 1950년 12월 31일 중공군 제 38군으로부터 제3차 공세를 받아 1951년 1월 3일까지 4일간 소요산과 마차산 일대로 철수하면서 적을 지연시킨 방어전투이다. 사단은 "동두천 북쪽 10-12km의 38도선 일대를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고 전곡-동두천 도로 좌측 고능리 부근에 제7연대를, 우측의 추동리 지역에 19연대를 배치하였다. 2연대는 마차산과 소요산 일대에 진지를 배치하고, 포병은 봉암리 일대에 진지를 점령하였다. 사단은 효과적으로 임무를 수행하였고, 인접지역이 무너지자 적진중에서 고전을 치렀다. 6사단은 동두천 부근에서 방어진지를 고수하고 그 임무를 완수한 전공으로 대통령부대표창과 미 제9군단장의 부대표창을 수여받았다. 사단은 이 전투에서 적 사살 594명(추정), 포로 22명, 기관총 7정, 각종 소총 97점을 노획하였고, 아군은 손실이 장교 7명, 사병 43명 전사하는 희생을 치렀다.
4. 한국전쟁 이후의 동두천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동두천은 미2사단의 주둔지로 중요한 미군의 전방기지 방어 역할을 하고 있다. 미2사단의 상징은 ‘인디안 헤드’이다. 인디안의 머리 즉 미국의 독립전쟁 이후 진행된 초기 미국에 찬란한 역사를 자랑한 기병대의 역할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상징은 1918년 사단의 창립 초기에 채택이 되었다. 사단의 열차보급부대장이 공모를 하여 뽑은 것이라고 한다. 미2사단은 1917년 10월 26일 프랑스의 부르몽에서 탄생하였다. 당시는 미국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직후로 연합군 사이에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접전의 시기였다. 미 2사단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8월 20일 9보병연대를 선두로 전 병력이 부산 교두보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1951년 2월 중공군의 겨울 공세를 홍천 근방 지평리에서 적을 효과적으로 방어했다. 이것은 중공군에게 최초로 타격을 주고 승리한 전투로 이승만 대통령이 우수부대 표창을 내렸다. 해마다 2월이면 지평리에서 그 날을 기념하는 행사가 치러진다. 전쟁 후 1954년 8월 20일 귀국하여 1957년 일시 해체되었다가 이듬해 독일에서 귀국한 10사단의 병력과 장비로 재조직되어 1965년 7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1971년 7사단이 철수한 이래 남한에 주둔하고 있는 유일한 전선 부대이다. 사단의 사령부는 동두천의 캠프 케이시(Casey)이다. 약 20여개 이상 산재한 미군 부대 사단 사령부 지역으로서의 동두천은 지금까지도 그 역할을 하고 있다.
1971년 2월 6일, 한미 양국 정부는 주한미군감축문제 및 감군, 보완책인 한국군 현대화 계획에 완전 합의했다고 서울과 워싱턴에서 동시 발표했다. 미국의 주한 미지상군 감축 방침에 따라 1970년 7월 11일 한미군사실무 회담의 처음 열렸고, 이 문제들이 논의되어 온지 2백 10일만에 이룬 합의였다. 이로서 서부전선의 미2사단은 1965년 7월 1일, 미 제 1기갑사단과 교체이후 지키던 비무장지대 방어진지를 한국군에 넘기고 문산에서 동두천 미 7사단의 자리로 이동했다. 그리고 1971년 3월 27일 상오 10시 30분에 용산에서 7사단 이한식이 미 8군 연병장에서 이루어졌다. 미 7사단은 이한과 동시에 본국에서 해체되기로 되어 있었다.
미 7사단에 대해 잠시 살펴보겠다. 미 7사단은 1917년 12월에 창설이 되었다. 해방이 된 이후 1945년 9월 8일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일본 항복과 동시에 38도선 이남의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인천에 상륙한 것이다. 이후 군정 3년간 국군 창설을 돕고 1948년 12월 정부수립과 동시 일본으로 철수하였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터지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인천상륙작전의 주력부대로 참전하였고, 서울 탈환, 압록강 혜산진까지 진격하였다. 그 이후 중공군과 2년여간 격전을 거친 부대이다. 특히 1953년 6월, 휴전 전 5일간 중공군을 맞아 5일간 2개사단과 전투로 적 7천 여명을 섬멸하였다. 그리고 1백여 명의 한국 청년들을 일본으로 데려가 카튜사 부대를 처음 창설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기간 중 미7사단 장병은 1만 5천 1백 26명의 전사상자를 내었다. 1956년 이승만 대통령은 미 7사단의 용기과 무공을 기려 부대표창을 하고 우리 민요 아리랑을 이 사단에 선사, 민족적일 감사의 뜻을 전했다. 사단은 전쟁 후 동두천 일대의 대민사업을 적극 전개하여 한국민과의 우의를 투터이 하였다. 군사원조 자금 29망 9천 달러로 동두천 일대의 댐, 고아원, 교량 등 26개 시설과 8개 의료기관, 99개의 교실 등을 지어주고 8개 고아원에도 15년간 모두 54만 달러를 지원해 주었다. 아울러 피가 모자란다고 하면 장병들이 앞 다투어 헌혈을 하였고, 홍수나 가뭄시에도 군장비를 동원하여 재난 극복을 도왔다.
이러한 미군의 주둔지로서 동두천은 국제도시가 되었다. 다수의 혼혈아들이 생겨나고 국제결혼도 이루어졌다. 우리나라의 혼혈아 1호는 ‘조지’였다. 부산 텍사스 거리의 왕자인 그는 미군 혼혈아 1호였던 것이다.
또한 동두천에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기지촌이다. 동두천을 중심으로 문산 선유리, 파주 용주골, 법원리, 장파리, 운천리, 의정부 등이 그 곳이다. 이국에 홀로 부임한 미군의 외로움을 달래준 기지촌은 우리 역사에 또 하나의 아픔으로 남았다. 이 기지촌을 중심으로한 작품으로는 50년대의 쏘리 킴, ‘황구의 비명’의 담비 킴, ‘아메리카’의 영옥, 그리고 김명인의 슬프도록 아름다운 시 ‘동두천’이다. 이는 모두 미군 부대 주변에 살면서 비참한 삶을 고백한 글들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러한 기지촌이 뇌리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다. 오래지않아 주한 미 2사단도 평택으로의 이전을 앞두고 있다. 동두천에서 미군의 흔적은 점차 사라져갈 것이다.
5. 결론
한국전쟁 기간 중 동두천은 초기 전투에서 적에게 일침을 가한 지역으로 기억된다. 이후 한국군보다는 주로 미군과 유엔군의 주 전장 지역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중요한 지역이었던 것이다. 수도 서울을 방어하는 주 축선지역으로서 매우 중요한 격전지가 되었다. 전후 동두천은 미 7사단과 미 2사단의 주둔지로서 미군에 의해 명암이 갈린 지역이기도 하다. 현재 다문화 가정과 국제화의 대표적인 도시로 시작이 되었다고 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혼혈과 미군이라는 이질적인 문화요소로 인해 많은 아픔을 겪어야했다. 현재 우리나라는 미국인 뿐아니라 중국, 동남아 등 다양한 나라의 신부들과 결혼을 하고 있다. 따라서 다문화 가정의 문제점과 대책이 사회의 중요 현실과제로 다가오고 있다. 이런면에서 동두천은 미리 이런 문제를 겪은 지역으로서 그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건전한 다문화 사회를 이끌어갈 해결책을 동두천에서 만들어낸다면 미래 우리사회의 선진 문화를 유도해 나가는데 앞장 설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전쟁의 상흔을 대표하는 도시로서 인식되고 이를 극복하면서 발전하는 도시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외부 군사력의 도움으로 전쟁을 치른 흔적인 미국군과 전후 오랜 기간동안 함께 생활하고 있는 것이다. 아픔속에서도 그 한국 방어의 주력부대 였던 주한 미군과의 건전한 협력과 문제점을 도출하고 해결해 가는 경험 또한 매우 중요한 것이다. 한국전쟁을 통하여 얻은 소중한 자유 민주주의의 교훈과 전후 미군과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점과 이를 해결해가는 과정은 국제화되어가고 세계로 진출해나가는 우리에게도 소중한 경험이 될 것이다. 국제평화도시로서의 동두천은 이런 다양화의 맥락속에서 그 해결책을 만들어가면서 발전을 이룩해나간 대표적인 도시라고 할 것이다. 향후 미 2사단이 평택으로 이전을 하고 나면 그 현대사의 질곡을 넘어 새로운 평화이미지를 가진 도시로서 미래를 향해 보다 새롭게 발전해 나가야할 것이다. 과거의 소중한 경험을 토대로 접경지역이면서도 평화를 위한 기반도시로 살아온 동두천, 그 새로운 선봉에서 그 역할이 더욱 기대된다.